▲ 대산종사 발인식이 중앙총부 영모전 광장에서 거행됐다.
비닐하우스에서 법을 설하다

대산종법사는 왕궁영모묘원에 원기73년 5월부터 상주했다. 영모묘원 농기구를 보관하던 조립식 창고를 개조하여 대산종법사가 생활했다. 조립식 조실은 여름에는 한 없이 더웠다. 그리고 겨울에는 추워 바람구멍을 온통 비닐로 봉했다.

외부 인사 중 한 사람이 대산종법사를 만나려고 왕궁에 왔다. 시자가 비닐하우스로 안내하자 '나를 왜, 닭장 속으로 데리고 가는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산종법사를 만난 사람들은 소박한 풍모와 범접할 수 없는 법력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곤 했다.

대산종법사는 평생 소태산대종사와 정산 종사 보다 더 나은 집에서 기거하여 본적이 없다. 신도안에서도 좋은 집 지으려고 하면 절대 못 짓게 하고, 원평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초가삼간에서 생활했다. 일상생활이 검소함과 평범함 그 자체였다.

종법사를 퇴임하다

대산종법사는 원기47년 종법사에 취임하면서 종법사의 임기는 보궐 임기를 제외하고 2기까지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그러나 교단의 상황이 취임 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산종법사까지는 임기제에 구애 받지 말자는 교단적 정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대산종법사는 33년간 6차에 걸쳐 종법사직에 재임하며 원불교를 세계적 종교로의 초석을 세워나갔다.

원기79년 11월, 대산 종법사는 생전에 종법사를 퇴임하여 '상사(上師)'에 추대됐다. 대산 종법사는 원기79년에 종법사에서 퇴임하고 상사로 추대된 후 상사원(上師院)을 그동안 사용해오던 왕궁영모묘원 조립식 집으로 정하고 교단의 스승으로 말년을 보내며 정양했다.

대산종사는 종법사 재임동안 훈련강화를 주창하며 전국 각지에 훈련원을 연이어 건립, 심전계발의 터전을 마련했다.

원기52년 정산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삼동원 개척을 시작했다. 이는 인류심전계발운동의 일환이며 그 첫 사업으로 훈련원 건축불사에 힘을 쏟은 것이다. 그리하여 국내와 해외에 훈련원을 설립하여 전 교역자와 전 교도에게 훈련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했고, 원불교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하게 했다.

특히 미국교화에 큰 원력을 세우고 30여 년 전부터 미국 행가를 염원해 오다가 원기 81년 5월에 도미하여 약 3개월여 동안 머물며 하와이국제훈련원 봉불식에 임석하는 등 해외교화에 큰 기운을 불어넣었다.

하와이국제훈련원 봉불식에 다녀온 대산 종사는 "나의 일은 다 끝났다"고 하며 지금까지 수 없이 그려오던 일원상(○)을 더 이상 안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에 재가출가 교도들에게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마라" 하고, 최후 염원을 담은 '기원문 결어'로 원력을 뭉치고 정양했다.
▲ 대산종사 총부 종법실에서 열반상을 나투다.

대산종사 열반에 들다

대산종사는 총부 종법실에서 대중에게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는 게송을 전하고 원기83(1998)년 9월17일,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반에 들었다. 세수는 85세, 법랍 70년, 종법사 재위 33년, 법위는 정식 대각여래위였다.

새 회상 원불교에 '소태산대종사가 하늘(天)이고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면 정산 종사는 땅(地)이고 만고신의(萬古信義)이며, 대산종사는 사람(人)이고 만고대의(萬古大義)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성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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