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육쌍전 실천의 화신불

새 회상 창업기에 보화당 등을 설립하여 교단 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교단 사업계의 주역. 고매한 인품과 신성을 겸전하여 영육쌍전의 모범을 보인 도산 이동안(道山 李東安,1892~1941) 대봉도.

그는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함평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세밀하며 세정을 잘 알아주는 포용력이 있었다. 원불교와의 인연은 일산 이재철 대봉도의 인도로 원기3년 대종사를 친견하고 사은 법문을 받들고 환희심을 냈다.

이후 대종사의 지도로 원기5년 '묘량수신조합'을 설립해 신흥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영광의 저축조합을 본받아 소비절약과 근검저축으로 생활개선과 자립운동으로 시작했다. 자금이 확보되자 저리융자, 농사방법개량, 황무지 개간, 신정예법을 통한 생활개선과 도덕운동을 펼쳤다. 또한 조합 회실을 이용해 야학을 실시해 배움의 기회를 넓혀갔다.

원기8년에 출가를 단행했다. 당시 가정은 5남매를 두고 상처를 해 출가가 어려웠으나 아우에게 식구들을 부탁하고 전무출신의 길을 택했다. 출가한 해 구간도실이 좁고 습해서 영산원을 신축하는 일을 도왔다. 대종사는 불법연구회 창립을 준비 중이었다. 원기9년 6월1일 익산소재 보광사에서 열린 창립총회에 영광지역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대종사의 명에 따라 김제에서 추산 서중안 대호법이 경영하는 인화당 한약방 실무를 보는 한편 익산 송학동에 소재한 동양척식회사의 임대전답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원기10년 4월에 정수위단 1차 보결 및 대리단원을 조직할 때 손방단원에 임명됐다. 또한 육영부 창립 발기인이 되어 인재양성을 위한 육영부 창립자금 확립운동을 전개했다.

원기12년에 서무부장, 상조부장에 이어 원기15년부터는 영산지부장을 겸임했고, 원기17년부터는 농업상조사업장으로 일했다. 원기19년엔 공익육영장으로 인재양성에 참여했다. 원기20년에 이리보화당한약방을 설립해 전무이사로 봉직하며 교단경제의 토대를 세웠다. 원기25년부터 열반 전까지 산업부장을 역임했다. 이때 수농, 전작, 축산 등 3부를 두어 양돈, 양계를 장려하고 수계농원의 근간인 삼례과원을 만들었다.

한때 모든 부원이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의 병세는 더 심해서 위독할 정도였다. 대종사는 매일 산업부에 들러서 "우리 동안이를 살려줄 의사만 있다면 불법연구회 절반을 주겠다"할 정도로 지극히 아끼는 제자였다.

이처럼 사업계에서 주로 봉직하며 실천한 사업정신과 인간상은 후진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첫째는 신의를 소중히 여겼다. 둘째는 공중사를 중히 여기고 박리다매(薄利多賣)의 원칙을 지켰다. 셋째는 사업을 하면서도 교화와 교육을 위한 일환으로 영육쌍전의 정신을 실행했다. 이러한 실천아래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소성대(以小成大)는 천리의 원칙이란 표준으로 공부와 사업을 했다.

그가 열반하자 산업부원들은 인자한 인격, 철저한 신앙, 지극한 공심을 가진 인화의 주인공으로 새겼다. 원기26년 교단의 중진으로 한참 일할 나이에 49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자 대종사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초창 당시 나의 뜻을 따라 신앙 줄을 바로 잡았으며, 모든 공사를 할 때 직위에 조금도 계교가 없었다"며 애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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