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100년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개교 100년의 새해라고 별다를 것은 없지만 묵은 세상이 지내가고 후천의 새로운 문명세상이 열릴 즈음이다.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삶과 문명을 주창하며 인류의 전면에 등장한 새 종교문화운동 원불교 공동체가 100년을 맞는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역사적인 일이다. 이는 원불교 운동이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의 기치를 내걸고 일제와 해방 후 혼란,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그리고 빠른 경제성장과 물질문명 사회를 겪어오면서 새로운 문명운동의 절실함에 부합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 회상 원불교가 장차 미래 인류의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넘어야 할 과제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대산종사는 원기73년 교단창립 2대말 총회를 마치고 개교 100년을 준비하는 메시지로 '대적공실'의 의두 요목을 제시해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원불교의 새종교 운동이 과거 불교와 기성 종교의 혁신을 주장하는 것은 맞다. 영육쌍전, 이사병행, 동정일여, 무시선 무처선,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말하고 출가와 재가의 차별 인습을 타파하며 생활종교를 지향하는 것은 역사적 소명이다. 종교의 독선기신과 종교간 불통과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생활 예법의 새로운 지향은 종교 혁명에 가깝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 운동이 역사적 성찰과 요청에 부응한다고 할지라도 성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이비다.

성리란 우주만유의 생멸변화와 심성의 변화소멸을 합당하게 해명할 근본 진리다.

교리적으로 말하자면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다. 일원상의 진리가 곧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리의 세계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자리라 개념과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종교가 신앙과 더불어 수행을 말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말을 놓고 그 참뜻을 대중에게 전하기도 어렵다. 이것이 성리의 넌센스이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자리는 알고 보면 찰나지간 단칼에 드러나는 세계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조차 거칠 것 없이 곧바로 들어간다.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의 오관을 쉬어서 생각이 잠자면 바로 성리의 체에 이른다. 묵묵심통의 이치가 바로 도솔천이요 일원상이다. 일원상이 곧 여래의 불성이요 중생의 본성이다.

세속의 왕자였던 싯달타 태자가 수행보살을 거쳐 서가모니 부처님이 된 것은 이 도솔천을 찾아서 내 집을 삼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뱃속이란 출생 전으로 분별주착이 없는 세계이므로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어서 강연히 중생제도를 마쳤다고 했다. 세존께서 정각을 이루고 처음 법륜을 굴린 녹야원으로부터 열반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팔만사천 무량법문이 다 이 공으로부터 비롯하였으므로 한 법도 설한바가 없다고 했다. 없고 없고 없다는 것도 없다.

이 공한 체성을 아는 것이 견성이요 공함을 회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양성이라면 우주일가 사생일신의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 부처다. 산부처가 없으면 세상은 빈 집이요 원불교 100년은 모래성일 뿐이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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