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소태산, 절실한 구도 고통을 알아 깨달음 기준 제시
수행을 바르게 하고 싶다면 〈일원상법어〉 대조해야


세상에는 나름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많다. 종교가에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행 단체에서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의 무리가 싫어서 여기 저기에 속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뇌하며 은둔의 수행길을 걷는 사람도 또한 있다.

수행을 통했건 아니면 계시나 죽음의 체험 등으로 진리 혹은 영적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요즘에는 많이 회자가 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돈을 야기하는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인지가 발달되고 수행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라 좋은 일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기준이 없다 보니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어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람 조차 믿기에 헷갈릴 정도다. 수행을 하는 당사자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고 선지자를 따라서 수행을 하려고 해도 누가 바르고 깊이 있게 수행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으니 어찌 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 시간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

소태산은 진리를 알고 싶어 스스로 많은 스승을 찾아 헤멘 아픔이 있기에 깨달은 후 '진리를 진정 깨달으면 이런 마음이 된다'는 것을 제시했다. 즉 깨달음의 기준을 말이다. 수행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어둠 속 한 줄기의 빛처럼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 기준이자 이정표가 〈일원상 법어〉다. 법어를 요즘의 사회적 언어로 바꾸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진리를 깨달으면 온 세계가 모두 우리의 소유다.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하나다. 또는 이 진리는 깨달은 모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근본 마음이다. 동물들의 생로병사가 계절의 춘하추동처럼 돌고 돈다. 죄복을 짓고 받는 이치는 음과 양이 서로 이겨가며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과 같다. 또는 그 근본이 모자람 없이 담뿍 찼으며 세상을 향해 지극히 두루 공평할지언정 이기적이지 않다. 이 진리는 육근을 각각 사용하는 데 있어서 마음의 토대가 비어서 두루 위하나 씀씀이에 이르러서는 이기적이지 않고 균형과 조화롭게 어울려 은혜를 나타낸다'

이 수행의 기준은 원불교 수행자는 물론이고 이웃 종교와 수행단체 그리고 수행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수행을 좀 한다는 사람이 오히려 일반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으로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른 길보다 마음을 달래어 인심을 사려는 데에서 많이 나타난다.

수행을 바르게 하고 싶다면 〈일원상 법어〉에 자신이 가까워지는지 살펴서, 오히려 멀어지는 느낌이라면 뭔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한다.

〈일원상 법어〉의 세세한 것은 설사 놓치더라도 수행을 하면 최소한, 마음이 순수하고 포용과 배려의 모습 정도는 지녀야 한다. 수행자가 이것에 아닌 말을 들으면 바른 수행길을 걷는 사람은 아니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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