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륜에 몸을 실은 청년들의 '새생명운동'
사무여한 정신으로 폭염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 선 국토순례 대장정
9년간 53명 순례단원, 7억 여원 성금모금, 380여 명 어린 생명 소생시켜

원기100년을 앞둔 시점에서 본사에서는 옛 것을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현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12주에 걸쳐 교단의 각 분야에서 희미해진 각종 사업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는 창조적 계승의 측면과 미래 에너지로의 승화를 간절히 염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달에는 어린이 민속큰잔치, 심장병어린이돕기 국토순례, 출판문화, 불전도구 등에 대해 살펴본다.

▲ 1회 고 길광호, 김무량, 하명규(단장), 강혜윤 단원. 2회 양원석(단장), 김도승, 신중경, 이성민, 김현길, 양성천 단원. 3회 이상순,서현조, 안명기, 김기홍(단장), 이정근, 정세완 단원. 4회 구동명, 이정근, 박용정(단장), 김제영, 김인창, 이인성, 황윤도 단원.
▲ 5회 박종성, 박덕희, 고세천, 오진명, 장호준(단장) 단원. 6회 김경국, 임인선, 류진성(단장), 김광철, 류공원, 전성공, 양명일 단원, 7회 이정호, 이이원(단장), 이종원, 유대관, 장의신 단원. 8회 안세명(단장)유세진, 양용원, 문정석, 강현진, 김도우, 이광덕 단원. 9회 김계현(단장) 조인서, 오종원, 고 김충식, 김신관, 이현무 단원.

교단의 순교정신이 희석되고 있다. 초창기 선진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사무여한'의 위대한 자산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김원도 와이즈비전 회장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아픔으로 우리사회는 참담하다. 그러나 과거를 짚어 보면 380여 명의 어린 생명을 살려낸 '새생명국토순례단'의 숭고한 역사를 떠올릴 때 가슴이 벅차 오른다"며 '새생명운동'이 다시 조명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당시 (주)삼천리자전거 전무이사였던 그는 "28년 전 회사로 찾아 온 예비교무들을 보고 '전문가도 하기 어려운 일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서까지 남기고 떠나는 그들의 공심에 그동안 머리로만 생각했던 창립정신이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회고했다. 새생명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왜 '선천성심장병 어린이 돕기'였나

새생명국토순례의 시작은 원기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주교구 문산교당 여름캠프 중 강태훈 어린이가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진찰결과 선천성심장병임을 알게 됐고 수술비 마련을 위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예비교무들은 엿과 오징어 가두판매에 나섰다. 가까스로 모은 성금으로 수술은 성공했지만 우리 사회에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어린 생명들이 너무도 많음을 알게 됐다. 치료가 가능함에도 거액의 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소외계층이 대부분이라 이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는 염원을 모아 원기72(1987)년 3월, 국토순례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구도적 열정으로 숱한 난관을 극복 해

1회 순례단은 하명규ㆍ고 길광호ㆍ강해윤ㆍ김무량 예비교무이다. 그들이 달린 2천3백여㎞의 장정은 매우 버거운 일정이었다. 또한 매일 매일 새벽기도, 가두모금, 저녁기도와 평가회 등을 진행해야 했다. 변변치 않은 장비와 사고의 위험이 극심했기에 구도적 열정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원불교학과 3학년이었던 강해윤 교무는 본지 인터뷰에 "첫 도착지인 대전역 광장에서 모금활동의 어색함을 잊을 수 없다"며 "안내차량 없이 험난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음에 사은님께 감사를 올렸다. 때론 거리에서 식사를 하고 폭염과 태풍, 피로감으로 극도로 예민해져 동지간에 다툼도 생겼다. 주사를 맞고 겨우 회복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완도소남훈련원에서 대산종사의 손을 잡으니 모든 갈등이 일시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단원모집'이었다. 이정근 교무와 같이 2차례(3, 4회)를 순례한 단원도 있었다. 준비부터 순례, 마감까지 1년간의 고된 일정을 알기에 선뜻 나서기란 쉽지 않았다. 바쁜 학사일정과 100일 기도, 체력훈련, 스폰서 발굴, 대외홍보, 물품구입, 현장답사, 회계결산 등 수많은 일들을 소화해 내야 했다. 그리고 순례 후 돌아오는 후유증은 스스로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나 어렵다는 대장정을 마친 단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강한 신념과 열정이 자리했다. 이러한 사명감은 교역에 임하면서도 지속됐다. 순례단원이었던 1회 고 헌산 길광호 교무와 9회 고 순산 김충식 교무의 거룩한 생애를 대중들이 잊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교단이 하나 된 '따뜻한 생명운동'

단원들에게 어려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국 각지의 교당에 도착하는 즉시 교도들과 함께 번화가를 중심으로 풍물을 치며 모금활동을 이어갔다. 지역 관공서 방문과 언론기관을 통해 원불교를 알렸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중한 성금과 교당 어린이들이 1년간 모은 귀한 저금통, 그리고 교도들의 봉사와 헌금이 하나로 어울려 교단을 '따뜻한 생명운동'으로 가득하게 했다.

이러한 성원으로 첫해 1140만원였던 성금이 원기77년 6회부터는 한해 성금 1억원을 돌파했고, 원기80년에는 누적성금이 7억원에 달했다. 생명을 찾은 어린이들도 첫해 9명에서 원기80년 9회까지는 328명, 순례단이 해체된 후에도 수술은 지속되어 380여 명이 새생명을 부여받았다.

원기74년에는 '은륜회(銀輪會)'를 조직해 새로운 방향성 모색에 궁리했고, '새생명 소식지'도 발행했다. 국토통일원에 '북한방문신청서'를 제출해 통일을 앞당기고 북녘의 심장병어린이에게도 혜택을 주기 위한 시도도 이뤄졌다. 해마다 열린 순례단원과 수술을 받은 어린이와 가족들과의 만남인 '은혜의 한마당잔치'는 감동의 드라마였다. 이렇듯 하나의 운동으로 정착되기까지 헌신적 노력과 열정이 지속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예비교무들은 실천으로 증명했다.

이 시대 생명운동의 화두 던져

원기76년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기념대회에서 심장병어린이돕기는 은혜심기운동 중 지속되어야 할 운동의 선례로 평가됐다. 원기79년 8회 단원들은 원불교신문에 '새생명운동을 원불교학과 예비교무들만의 행사가 아닌 원불교 청년들의 생명운동으로 확대할 것'을 제언했다. 교단적 행사로 승화시키자는 것이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그러나 새생명국토순례운동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성금모금에 대한 피로감과 사고의 위험성, 험난한 순례코스, 예비교무들의 현실적 고충, 심장병을 넘어선 아젠다 발굴의 어려움 등을 문제로 결국 10회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지 못하고 막을 내린 '새생명운동'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교단의 전 구성원이 함께 했던 그 때를 그리워할 뿐 지속가능한 생명운동은 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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