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시기 이전에도 하나의 두렷한 상이 엄연히 존재하였나니 서가모니 부처님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거늘 어찌 가섭이 이를 전했으랴(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이 화두는 송나라 때 자각(慈覺) 종색선사가 처음 제안한 이후로 지금도 불가에 면면히 전해진다. 자각선사는 불법연구회 당시 좌선 수행의 지도교재 일부로 쓰였다는 〈좌선의(坐禪儀)〉의 저자로 우리에겐 친숙한 편이다. 또는 〈불교정전〉의 의두요목에도 들어가 있고 또는 불법연구회 〈근행법(勤行法)〉 속표지의 일원상 아래 마치 화제(畵題)처럼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의 표현이 들어있기도 하다. 이 무렵 불단에 모셨던 목판 일원상에도 나타나 있기도 하다.

여기서 옛 부처님이란 과거 7불의 뜻이다. 과거 장엄겁(莊嚴劫)에 출현하였던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의 세 부처님과 현재 현겁(賢劫)에 출현한 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서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의 4불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 부처님들이 세상에 나기 전에도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는 여여하게 존재했다는 말이니 다시 말하면 일원상의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불멸함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의 반전이 흥미롭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이 소식을 알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 수제자인 가섭이 법을 받아 전했을까 하는 물음이다. 서가모니 모른 소식을 제자인 가섭이 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7불의 일곱 번째 부처님으로 지금 불교의 교조다. 소승과 대승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종파의 뿌리는 서가모니불이다. 그런데 일원상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이 절벽에 갇힌 듯 턱하니 막혀 진전이 없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황당하여 생각이 먹먹하다. 생각이 문득 끊어지고 다만 그 물음의 근본 취지에 대하여 일심, 집중, 몰입에 이어 삼매가 된다. 마치 선종의 또 다른 화두 '이 뭣고?'가 연상된다.

이 자리는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비사량처(非思量處)다. 한 생각 이전의 자리라 생각이 일면 이미 저만큼 멀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하여 팔만 사천 법문을 행하고도 '나는 한 법도 설한바가 없다'한 것이 이 뜻이다. 절에 가면 대웅전 앞에 무설전(無說殿)이란 노천강당이 있는 것도 다 이런 뜻이 배어 있다. 제법성지 변산 개암사 뒤 울금바위는 신라 진표율사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는데 이름하기를 부사의방(不思義房)이다. 일체 생각을 내려놓는 방이란 뜻일게다.

생각이 쉬면 참 마음이 드러난다. 이른 바 각(覺)이란 것인데 시방세계가 다 한 집안이요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아는 것이다. 대산종사는 이 깨달음의 문에 들어가는 세 가지 공부를 제안하고 있다. 관공(觀空)의 공부이니 일체 생각이 쉬면 우주만유가 하나인 것을 아는 공부가 그 첫째요, 양공(養空)이니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인 자리를 길러서 회복하는 것이요, 행공(行空)이니 알고 회복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일가(世界一家) 사생일신(四生一身)을 실천하는 삶이 그 셋이다.

바야흐로 물질개벽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어 정신개벽으로 세계를 한 집안 삼는 주인공이 아니고는 득세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수행은 속세를 떠난 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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