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부건설 일익 담당

새 회상 창립기에 익산총부 건설과 전주지방 교화에 일익을 담당하여 제1대 제1회 1등 유공인의 성적을 나툰 오타원 이청춘(五陀圓 李靑春,1886~1955) 대봉도.

그는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정환경이 어려워 '화춘'이란 기생의 이름으로 파란 많은 생활을 했다. 생 자녀가 없어 중년이 되도록 외롭게 살았으나 성격은 명랑 쾌활하고 실천력이 뛰어났다.

꽃다운 시절을 다 보내고 38세 무렵에 태을교를 내왕하기도 하고,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와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과 교분을 가지면서 종교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서 인생살이의 참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이때 '돼지 자웅이 노는 것을 보고 마음에 깨친바가 있어 세간 향락을 청산 하고 도문에 들었다'는 내용이 〈대종경〉 실시품 26장에 나온다.

원기8년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의 인도로 입교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청춘'이란 법명을 내리니 시들어 가는듯한 생에 새 기운을 얻게 되는 듯 했다. 이후 대종사를 가까이 모시면서 입선과 청법을 즐기며 수도 정진하여 제1대 1회 기념총회 때는 1등 유공인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대종사께서 원기9년 3월에 7인제자를 발기인 삼아 불법연구회 창립을 서둘 때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제자가 됐다.

그가 불법연구회에 참여할 때는 전무출신들의 공동생활은 적수공권으로 생활방도가 막연했다. 그동안 근검절약하며 저축했던 재산 논 70두락을 입교기념으로 희사했다. 그 때의 상황이 〈대종경〉실시품 26장에 실려 있다. 대종사께서는 "그대의 뜻이 심히 아름다우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과 끝이 같지 아니할 수 있으니 신중히 생각해 보라"며 여러 번 거절했다.

그는 한결같은 마음에 변동이 없을 뿐 아니라 대종사의 여러 번 거절함에 감동하여 받아주기를 원했다. 그러자 "덕을 쓸진대 천지같이 상없는 덕을 써서 영원히 그 공덕이 멸하지 않도록 하라"며 허락했다.

원기14년 44세 되던 해에 〈월말통신〉 제22호에'40평생의 광음(光陰)을 보내고 또 기사(己巳)마저 보내며'란 제하로 자신의 반생을 회고하는 글을 발표하며, "오늘의 청춘은 천만 년 가더라도 청춘으로 일관하리라"고 결심했다.

원기19년 총부순교로 1년간 봉직했고, 원기20년에는 사재 1천여 원을 투자해 고향인 전주에 가옥과 기지를 매입하여 전주출장소 간판을 걸고 전주교무로 활동했다. 원기28년에는 여자 정수위단원에 피선됐고, 원기33년에는 남선교당 교무로 재직했다.

그는 젊어서 비록 인생의 정로에서 벗어난 길을 걸었으나 정로가 아님을 각성한 후로는 용맹있게 금강이도(金剛利刀)로 오욕락과 세속인연을 단절하고 대 개혁의 생활을 했다. 그런 결단력으로 도문에 입참해서는 변치 않는 신성으로 시종여일하게 수도인의 규칙을 엄수했다.

그는 맹구우목 보다 더 신기하게 대종사를 친견하고 도문에 입참한 후 대종사를 가까이에서 구전심수로 법을 익히며 행복자로 살았다. 원기40년 전주양로원에서 70세를 일기로 열반하자. 응산 이완철 종사는 추도사를 통해 "전주 이화춘이 변하여 원불교 이청춘이 되었다"며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른다더니 속세에 묻혔던 범부가 변하여 보살이 되었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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