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실천력의 전무출신

원불교 창립의 주역인 정산 송규·주산 송도성 여래를 교단에 희사하고, 자신도 전무출신으로 무아봉공한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1876~1951) 대희사.

그는 전통 깊은 유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남의 거유인 사미헌 장복추의 문하생으로 18세부터 매년 유림강습회에 참석하고 경향간(京鄕間) 과장(科場)에 출입한 유학자였다. 17세에 준타원 이운외 대희사와 결혼해 1900년에 정산종사를, 1907년에 주산종사를 낳았다.

정산종사가 남다른 뜻을 품고 구도행각을 벌일 때 이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다. 정산종사 18세에 "전라도로 가야 큰 스승을 만날 수 있겠다"고 하자 모든 준비를 해서 김천역까지 아들을 전송했다.

정산종사는 모악산 대원사에서 머무는 중에 정읍 화해리에 사는 김해운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갔다. 이때(원기3년 4월) 친히 찾아온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어 회상 창립에 동참하게 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대종사를 친견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 원기4년 9월에 이사를 단행했다. 이에 유림에서는 '전라도 사교에 빠져 일가친척도 모르고 패가망신 하러간다'고 비난하며 소명출계까지 당했다. 이에 더해 전라도로 이사 올 당시 전답과 집을 마련할 돈을 미리 맡겨 놓았는데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전 가족이 물질적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하늘이 낸 효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효성이 극진했던 그는 전무출신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병환 중인 부친의 간호가 급선무였다. 원기9년 부친이 열반하자 출가를 단행하여 영광지부 초대교무로 부임했다. 이후 영광교무부장, 마령지부 교무, 삼례지부(현 수계농원) 교무, 금산(현 원평)지부 교무 등 일선교당 교무로 23년간 봉직했다.

그는 천성이 순수하여 사량계교를 할 줄 몰랐다. 이런 성격은 수행에도 철저하여 한번은 수양에 전력하며 수승화강을 바라다 오히려 두통을 얻게 되자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은 내용이 〈대종경〉 수행품 40장에 실려 있다. 또한 유학에 능했던 그는 대종사와 유교 경서에 대한 문답도 나눴는데. 〈대종경〉 불지품 6장에 중용의 솔성지도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그는 덕인이었지만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함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용기 있는 전무출신이었다. 원기24년(1939) 마령교무로 재직시에 전국적으로 한발피해가 빈발하자 일왕 앞으로 투서를 했다. 실정을 지적하며 '소화(昭和)'라는 연호는 '소화(燒火)'를 의미하니 바꾸라는 등의 주장을 했다. 무기명 투서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은밀히 내사하고 진안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여기에 참석한 그를 필적 대조로 현장에서 연행했다. 그는 '천황불경죄'로 광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로 인해 지도책임을 물어 대종사도 경찰서 호출을 받았고, 교단에 대한 사찰이 강화됐다.

그는 역사의식도 깊어 '정산종사 구도역정기'를 썼는데, 후일에 〈원광〉49호에 발표해 귀중한 사료로 남아있다. 또한 문필에도 능해서 〈월말통신〉, 〈회보〉, 〈원광〉 등에 감각감상, 시, 수필 등 다양한 글을 발표했다. 특히 남원 광한루 경내에 한시 2편이 현판으로 남아있다.

정산종사의"서원성불제중(誓願成佛濟衆) 귀의청정일념(歸依淸淨一念)하시라"는 법문을 새기며 76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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