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원불교 교도가 되면서 소태산대종사의 대각(大覺)을 세상에 널리 알릴 사명을 각자의 처지와 환경에 따라 부여받았다.

소태산대종사의 진리에 대한 지극한 간절함은 대각으로 탄생했고 그 깨달음의 사명은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태산대종사의 개교표어는 '정신을 개벽하라'의 명령어도 아니고 '개벽된다' 의 예언서도 아닌 '개벽하자'는 동행의 의미로, 진리에 바탕한 생활개벽운동이 되어 스스로 개벽의 주인이 되고 서로서로 함께 개벽하자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개벽의 소식은 하늘을 감동시킨 구인선진의 백지혈인(白指血印)으로 나타나 원불교 창립의 기초인 사무여한(死無餘恨) 무아봉공(無我奉公)을 탄생시켰다.

광주과학기술원 정진홍 교수는 우리 원불교인을 '하늘을 닮은 맑고 깨끗하며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하늘을 감동시킨 법인기도정신이 생활 속에서 빛을 발하고 발밑에서 몸으로 증명되니, 이것이 그 거룩한 방언공사로, 저축조합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이어진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정신은 이소성대(以小成大), 일심합력 (一心合力)으로 또 다른 창립정신이 되었다.

이러한 헌신과 자립의 창립정신을 바탕한 원불교가 100년이 됐다. 이제 다시 새롭게 맞이하는 우리의 100년, 200년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정진이 더욱 요구되는 때다.

그 해답은 소태산대종사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정전〉과 〈대종경〉에서 찾아야 한다.

〈대산종사법어〉 교리편 7장에서 "〈정전〉은 대종사의 몸이요, 마음이요, 실천이니 〈정전〉에 밝힌 대로만 공부하면 누구나 여래가 될 수 있느니라"고 했다.

정산종사는 기연편 10장에서 "이 법으로 부처되는 길만은 확실히 자신하였나니, 그대들이 기필 성불하고자 하거든 대종사의 교법대로만 수행하고 나의 지도에 순종하라…"고 했다.

〈대종경〉 부촉품 3장에서 "열반을 일년 앞두시고 그동안 진행되어오던 〈정전〉의 편찬을 자주 재촉하시며 감정의 붓을 들으시매 시간이 밤중에 미치는 때가 잦으시더니, 드디어 성편되매 바로 인쇄에 붙이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일생의 포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며칠 전 사회지도자를 만나 들었던 이야기다. 캄보디아 총리와의 면담자리에서 원불교를 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들려준 얘기란다.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는 원불교는 여러기관을 운영하면서도 요구사항이 없다. 조용히 다른 곳들과 구분되게 운영한다'는 것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신앙으로 온생명을 부처로 섬기는 우리 원불교 형제자매들,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으로 일상의 정진으로 행복한 우리들이다.

여래의 꿈을 꾸고 세계를 향한 제2의 개교운동을 전개할 우리들 마음속에 안된다는 냉소병을 내려놓고 출가교도는 아름다운 출가동기로 돌아가고 재가교도는 설렘과 다짐으로 맞이했던 입교 당시로 돌아가면 거기에 대종사와 구인선진이 온 몸으로 일구었던 창립정신과 하나 될 것이다.

'100'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완전함, 가득함으로써의 '100'을 쓰는 경우로 백년해로, 백발백중이 그런 뜻으로 쓰인다. 또 하나는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지나온 원불교 100년이 맑은 영성에 바탕한 자립과 헌신의 100년이었다면 새롭게 시작될 또 다른 100년은 도전과 열정의 시대가 되길 기원한다.

대서원의 첫 새벽에 자립과 헌신의 원불교 정신을 되새겨 본다.

개교표어는 명령어도, 예언서도 아닌 동행의 의미
원기100년의 설계, 〈정전〉과 〈대종경〉에서 찾아야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사무총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