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운세를 본다. 인터넷을 통하든, 직접 역술인을 찾든 간에 운세를 본 사람들은 은연중에 하나의 관념이 되어 운명처럼 운세를 믿게 된다. 그러나 운명도 결코 고정불변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라의 의상과 원효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향했다. 어느 날 들판에서 잠을 자다가 원효는 목이 말라 캄캄한 밤중에 더듬거려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견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한줄기 청량제처럼 달고 맛있었다. 날이 밝자 그 물이 어떤 물이기에 그리도 맛있었을까 확인하는 순간 구토가 나오고 말았다.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이 순간 원효는 '일체유심조'의 소식을 깨달았다. 원효는 의상에게 "당나라가 오도를 위한 피안이 아님을 알았으니 신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라' 모든 것은 나의 생각의 변화로 재창조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내 마음의 변화를 시도하려 하기보다는 주위 여건과 환경, 제도와 인연들에 의해 나의 삶이 좌우되는 듯 그들이 변하기를 기대하고, 고치려 하는 경우가 많다. 관습과 고정관념에 갇혀 살다보면 우리 삶의 발전적 변화는 어렵다. 요즘 기업에서 선호하는 인재는 성공만을 거듭한 인물이 아니라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이라 한다. 실패의 경험 위에서 새로움을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깨어있는 성숙한 삶을 원한다. 알을 깨고 나와야 병아리가 되듯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마음을 깨트려 버릴 때 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의 시대는 합리와 양심에 바탕한 바른 길이 아니면 통할 수 없는 시대다. 또한 모두 다 고르게 잘사는 함께 하는 정신으로 양극단을 놓고 중도를 실천해야 환영을 받는 시대다. '땅콩사건'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대한항공 조현아 전부사장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일체유심조'는 한 곳에 묶여 있는 기울어진 마음이 아니라, 가장 균형 감각이 있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의 원래 마음자리는 텅 비어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의 조화가 가능하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고에서 벗어날 때 마음의 자유를 얻어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원불교100년의 첫 아침, 을미년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많아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양계는 물론 음계의 인증을 받은 일원대도 영겁법자 일원회상 영겁주인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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