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의 세말은 '갑'에 대한 분노로 점철됐다. 이제는 일상어가 돼버린 '갑질', 즉 있는 자들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우리 사회에 유령처럼 떠다닌다. 비행기를 되돌린 땅콩 부사장이, 경비원을 죽음으로 몰고간 아파트 주민이, 이른바 '열정페이'로 청년들 등골 빼먹고 버린 기업들이 도마에 올랐다. 양처럼 온순한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많은 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래 참아왔는지도 모른다. 사돈의 팔촌까지 헤아려봐도 온통 '을'뿐인 세상 속에 우리는 극소수 갑들의 안하무인 슈퍼갑질을 견디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말해봤자 나만 손해다, 누군가 바꿔줄 거다 생각하며 생계를 핑계로 불의를 눈감아 온 것이다.

덮어놓고 욕하고 한탄할 것만은 아니다. 갑과 을은 내 직장에도, 우리 교단에도 존재한다. 사회에선 자본이나 권력이 갑의 요소라면 교단에서는 연차나 직함이 갑을을 결정한다. 특히 인사 이동기에 나오는 문제제기는 이 갑을관계 속에 무참히 부서지고 만다.

누구나 '갑'이 되길 원하지만 대부분이 '을'로 살게 되는 삶. 그런데 드물게 자발적으로 을이 되는 참신한 '슈퍼을질'도 있다. 원불교환경연대가 판매하는 은혜의집 콩나물은 '고객님을 모시는 초을질의 자세'를 표방한다. 2천원짜리 콩나물 한 봉지를 공손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판매하는 그들은 커미션 1원도 없이 은혜의집을 위한 '을'을 자처하고 있다.

SNS교화의 지평을 연 KAIST 조창순 교도의 '원불교는 치킨 먹어도 됨(원치됨)' 페이지도 어찌보면 초을질이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서서 만들고는, 비교도들의 악플에도 재치있는 답변으로 무지에 따른 배척을 일깨운다. 일일이 답글을 달며 온갖 감정노동도 마다치않는 그야말로 교화를 위한 자발적 '을'이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을'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지만, 교단과 교화를 위해서는 환경연대나 '원치됨'처럼 '을'이 돼야 한다. 그것도 자발적이며 정당한 '슈퍼을'이 되어야만 '갑'에 상처받은 우리네 평범한 이웃들을 교화할 수 있다. 잠자는 교도를 깨우는 데도 수없이 두드리며 나를 낮추는 을질이 필요하다. 일방적으로 찍어누르거나 텃세를 부려서는 세상의 을들을 끌어안을 수 없다. 권력은 이제 위엄의 실체가 아니라 분노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갑'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던 갑오년을 떠나보내고 우리는 새해를 맞았다. '을'미년에는 '을질', 그것도 자발적인 '슈퍼을'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나도 모르게 '갑'이었을지 모를 과거는 반성하고, 아름다운 '슈퍼을'로 현재를 살아내는 것. 이것이 곧 시대의식이며, 성스러운 미래를 향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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