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마음근본은 여래와 중생이 같지만 사용법 달라
차별과 분별 벗어나 성품으로 들어가는 공부 중요


마음의 근본인 성품에서는 여래와 중생이 같다. 하지만 마음을 쓰는 데에 있어서는 다르다. 여래는 마음을 쓸 때 성품에서 발현되어 쓰고 마음을 거두어 쉴 때는 성품에서 머무른다. 마음을 세상 밖에서 쓰다가도 거둘 때는 성품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일하러 직장으로 갔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마음이 출발할 때도 성품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여래의 마음 주소는 성품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 집은 성품이 아닌 차별이다. 차별에서 그 마음이 시작되어 차별심으로 돌아간다. 차별심은 좋고 싫어하는 마음이다. 전에 만났던 사람이 행동이나 일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어느날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때 느끼고 보았던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차별심을 집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다. 한번 미우면 다 밉다. 잘해도 밉고 못하면 더 밉다. 밥을 먹는 것도 밉고 걸어가는 모습도 밉다. 하여튼 밉다. 차별심에서 좋은 것도 마찬가지의 흐름이다. 차별심이 집인 사람은 시끄러워서 마음이 제대로 쉬지 못한 나머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보다는 좀 더 마음을 괜찮게 쓰는 사람은 차별이 아닌 분별에서 쓰는데 관념적인 분별이 아닌 객관적 분별에서 쓴다. 객관적인 분별은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잘하면 잘한대로 보고 못하면 못한대로 본다. 이런 마음은 객관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마음을 거두고 낸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갖추어서 마음을 아는 만큼 사용할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사람은 일을 미워할 지언정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전에 일을 그르쳤던 사람이 다음에 잘하면 그 잘한 일을 칭찬하며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어질고 지식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객관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쓰는 마음으로는 그 본질을 꿰뚫을 수 없다.

이보다 좀 더 마음을 깊이 쓰는 사람이 있다. 분별 이전의 성품에서 마음을 쓰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담을 넘어다니지 못하게 했는데 한 학생이 계속 담을 넘어다니자 대학 징계위원회에서 징계를 내리자는 회의가 있었다. 이 얘기를 들은 총장이 그 담을 없애서 학생들이 다니게 하였고 그 학생의 징계도 없는 것으로 했다. 규칙 이전의 본질에서 마음을 쓴 심법이다.

여래의 마음 주소는 본적과 현주소가 모두 성품이나, 중생의 마음 주소는 본적이 성품이고 현주소는 차별심이다. 즉 여래와 중생의 마음 본적은 성품이지만 현주소가 다르다. 내가 본디 여래지만 마음의 현주소를 보아서 차별에서 쓰는지 아니면 분별에서 쓰는지 아니면 성품에서 쓰는지 살펴보자. 마음을 차별에서 쓰고 있으면 분별로 쓰려고 노력하고, 분별에서 쓰고 있으면 성품에서 쓸 수 있도록 수행의 정성을 쏟는다면 마음의 본적과 현주소가 성품인 여래가 될 수 있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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