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를 하기 위해 만덕산에서 간사생활을 하던 1988년 여름, 대산종법사께서 만덕산으로 행가를 했다. 당시는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던 때라 대산종법사께서 오랜 기간 보위에 있는 것을 독재 정권과 같은 시각으로 말하기에 그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만덕산농원 원장인 양제승 원로교무는 이제껏 만났던 사람이 아니었다. 사는 모습 그대로가 경이로움이었다. 양 원로교무는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공부나 일에 조금이라도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알아채고 크게 드러내어 주니 신바람이 났다. 그 신바람에 더욱 열심히 일을 하며 차츰 일에 눈을 떠가던 때였고, 양 원로교무의 사는 모습에 감동이 있었기에, 그 분이 존경하고 받드는 분이라면 부처이겠다고 믿게 됐다.

일을 마치고 길을 가다가 산책을 하던 종법사를 뵈었다. 인사를 드리니 진중히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너를 잘 안다. 너 동이리" 하신다. 그 말씀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동이리교당에 다닌 것을 감추려고 법명까지 바꿨었고, 철저히 돈암교당 출신인 것만을 말하고 다녔는데 어떻게 내가 동이리교당 출신인 것을 아실까? 이에 대한 충격이었다. 내 기억 속의 종법사는 크게 없었다. 다만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선배들과 함께 계룡산에 등산을 갔다가 산책을 하던 어떤 분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이 있지만 그 분이 종법사인 것도 나중에 알았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 날의 나를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부처께서 아는 나는 누군가?'라는 화두가 폐부로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종법사께서 "여기 서울대 다니다가 출가한다고 서원한 놈 있는데 그 이야기 들어보자"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대중을 현혹시킬 정도의 언변이 있어서 환호를 받으면서 감상담을 마쳤다. 사람들이 와서 "이런 사람이 출가를 해야 한다"며 축하를 해주는데 기쁜 것이 아니라 넋이 나간 상태가 됐다. '내가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일 수 있지만 부처마저 속이면 나는 누가 구해주나?'하는 서러움이 까마득히 밀려왔다. 서울대를 다녔다는 거짓말이 이곳까지 이어졌고, 나는 또 거짓말을 밝히지 못했다. 거짓말을 밝히는 것보다 죽는 게 편하다 싶었다. 죽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이 고통이 죽음 이후에도 반복이 된다니 무서웠다. 이 고통도 힘겨운데 죽음 이후는 더 힘들다니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고비만 넘기고 〈대종경〉에 나온 말씀대로만 살면 행복할 세상이 눈 앞에 보이건만 거짓말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마저 속이면 누가 나를 구하나?'하니 그 뜻이 힘이 되어서 죽어도 못할 고백을 다음날 대중 앞에서 하게 되었다. "저 서울대 다녔던 것 아닙니다" 거짓말을 고백하고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 속에 살던 압박감을 벗어난 행복감은 컸기에 그 행복감은 일에 매달리는 원동력이 됐다. 일 속에서 맛보는 행복함은 다른 사람은 힘들다는 만덕산 생활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날 이후부터 '부처가 아시는 나는 누구인가?'가 늘 화두가 되었다. 그러던 다음 해 동선 중 염불을 하는데 너무 기뻐서 입술을 다물 수 없었다. 염불을 마치니 고요하고 맑은 즐거움이 한없이 밀려왔다.

텅 빈 고요함 텅 빈 맑음 속으로 떠올려보는 의두요목들이 하나 하나 풀렸다. 몇 가지 풀리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는 기쁨은 풀리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둘 여가는 없었다.

그 상황을 나는 견성이라고 믿었다.

<원남교당 / (주)이주넷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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