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스승 100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천연석채 이용한 작품 활동, 20년 이상 수련
회화문화재 복원모사로 전통문화 계승

삼동(三冬)에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남도에서 전해진다. 겨울이 깊은 만큼 봄도 움트고 있다는 진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홍매화가 전해주는 향기 따라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떠났다. 작품 창작과 회화문화재보존수복에 몰두하고 있는 호산 김범수(護山 金帆洙·법명 응규·장성교당) 교도를 만나기 위해서다.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방학임에도 장성군 황룡면 소재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가(生家)를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최근 그의 작품은 새로 조성될 영산성지 대각탑에 새겨질 예정이다.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의 의뢰로 진행되는 그의 창작 작품은 벌써부터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대각탑 앞뒷면은 부조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뒷면은 비천도를 구상하고 있어요. 비천도는 선녀들이 천의를 입고 부처님이 설법하는 곳에서 꽃을 뿌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상을 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이 화두인데 대종사 대각을 상징하는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가령 깊은 선정에 든 대종사, 그 교법을 받드는 중생들의 환희에 찬 모습 등을 구인선진들의 자료를 통해 영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속 깊은 선정에서 물을 긷듯 영감어린 그의 작품을 기대해 본다.

"저의 그림은 동양전통 채색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작품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만드는 과정을 하나의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과의 수행과정 속에서 나온 작품은 자연스럽게 선적인 깊이가 있죠."

그가 걸어온 채색화가로서의 길은 어땠을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작품의 철학과 사상도 변했으리라. "일본 유학을 갔다 오기 전까지는 수묵산수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유학 중 일본 채색(彩色)에 매료돼 동양 전통의 채색화를 배우게 됐습니다. 소재의 특성상 기교나 추상화 등을 부릴 수 없습니다. 동양 채색화는 조형적 회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안료(顔料, 천연석채)가 가지고 있는 특색을 살려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색을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연석채(石彩)인 무기안료를 사용해 작품 활동을 하는 그는 변색 없는 선명한 아름다움이 독특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무기안료는 천연광물에서 축출한 재료로 일종의 보석인데 이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후 아교와 함께 작업한다. 오래전 중국이나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백제 고분벽화 등에서 사용했던 것이 동양전통 채색기법이다. 석채는 변색을 방지하는 한편 그 성분의 고유한 결정(結晶), 광택까지 투명해 품위 있는 색감을 부각시킨다.

"안료를 안착시키는 과정이 난해해 손끝에 온전히 익혀가려면 적어도 20년 이상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채색화가로서 표현하고 싶은 의도대로 작업할 수 있죠. 동양의 안료들은 하나하나 품성(品性)이 들어 있습니다. 그냥 칠하면 안료 고유의 색깔이 발현되지 않아요. 빛의 굴절률이 대단히 높아 건조시켜 놓고 보면 다르게 나옵니다."

석채는 작품이 건조되면 훨씬 아름다운 색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안료가 젖어있을 때는 명도나 채도를 알 수 없다. 안료의 양과 접착제(아교)의 농담(濃淡)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다.

"요즘은 맥(脈)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스승님들을 무기안료와 유기안료를 섞어 선묵화를 그려내고 있죠. 안료들이 내 손끝과 호흡하며 고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작품 테마로 맥을 선정한 것은 교단100년과 연관이 있다. 여러 작품을 해왔지만 결국 그가 이른 곳은 교법의 정서가 묻어나는 선화(禪畵)다.

"대종사님 당대 선진어른들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1000호쯤 되는 크기로 그리고 싶습니다. 불화로 말하면 회상도(會上圖)라고 할까요. 동양 채색화의 안료들을 익히면서 고색채의 그림도 섭렵했습니다. 특히 국보급 예술품들을 재현복원하면서 회화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졌죠. 대종사를 포함해 구인선진, 교단의 큰 스승님 등 100상을 선묵화로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경봉스님을 비롯해 많은 고승들의 초상화를 그려왔던 그가 교단의 스승에게로 방향을 바꾼 것은 원기100년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의 발로로 보여진다. 100상의 선묵화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올해 안에 작업을 마칠 계획이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전시회를 거쳐 판매가 되면 전액 전무출신 인재양성 장학금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회화문화재보존수복연구소를 운영하다 보니 회화문화재 복원도 많이 했죠.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순천 송광사 16국사 진영 복원모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조국사와 원감, 정혜국사는 복원을 마친 상태입니다. 선암사 조사전 진영(육조혜능을 비롯한 8명의 조사) 복원모사나 도갑사 관음삼십이응신도 복원모사도 했지요."

이런 회화 복원모사로 약탈문화재나 소실된 문화재를 복원해 한국 전통회화의 위대성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는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에서 박사 3명과 석사 4명을 배출해 후진양성에도 정성을 다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회화미술을 시작한 그는 40여 년을 창작 활동에 전념해 예술과 수행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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