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맑고 싱그럽던 기운이 며칠 후 사라져버렸다. 그 기운이 사라지고 장님에게 눈을 뜨게 해서 며칠 동안 세상을 보게 하고는, 다시 장님으로 만들어버린 듯했다. 좌선을 열심히 하면 다시 나타날까 싶어 단전에 칼끝을 댔다. 전에도 단전주를 하면 아랫배가 바가지처럼 부풀어져서 잘 되었던 터라 별 생각 없이 단전주를 몰아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숨도 쉬기 어렵게 명치가 막혀버렸다. 기체라고 하는 적이 생겨버린 것이다. 적을 풀어보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더욱 심해졌다. 한동안은 밥도 먹기 힘든 정도였다. 그 후부터는 좌선만 하려면 명치가 꽉 막혀, 오랫동안 좌선을 하지 못했다.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하는 공부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아 줄 스승과 동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출가 서원을 했다가 떨어진 사람은 다시 출가를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5월 만덕산을 떠나게 되었다. 눈물이 났지만, 원망보다는 재가로서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음해 서울 명동에서 미용재료를 판매하는 외삼촌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로 배달하면서 '오토바이 위에서 성불을 하리라'는 서원을 세웠다. 그해 겨울, 자원하여 서울동부교구 청년연합회장이 되었다. 회장이 된 후 첫 미션이 전 회장단에서 추진하던 사업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동부와 서부로 나뉜 서울 교화시스템을 동·서부 통합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게 논의를 이어가라고 했다.

'그 말이 맞다' 싶어 동·서부 통합에 대한 일을 추진하던 중에 "철없는 짓이다"고 하는 대산종사의 뜻을 받들게 되었다. '동·서부가 나뉘면서 청년교화가 침체한 게 사실인데 어찌하여 이것이 철없는 짓일까'를 헤아리는데 바로 답이 나왔다. 현재의 청년회가 미래 세상의 주역이 된다면 과연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공부하지 않는 청년의 미래는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성현은 활법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살법(殺法)도 쓰면서 교화의 속도를 조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통합 논의는 접고 각 교당을 다니면서 공부모임을 주선했다. 일주일 내내 저녁마다 공부모임을 찾아갔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공부는 향상이 어려웠고 한계가 금방 드러났다. 그때 함께 공부한 청년들과 뜻을 합하여 원기77년 5월 사간동에 있던 서울시민선방에 수요선방을 개설했다. 원남교당 최희공 교도를 지도위원으로 초빙했다. 그곳에서 수십 명의 출가자들이 배출이 되었으니 지자를 지도위원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 효과는 컸다.

수요선방에 매진하던 중 〈원불교교사〉에 나온 교화단 조단법이 마음에 들어왔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종사께서 제정해 준 교화단법으로 하면 교화뿐 아니라 공부에 대한 방향도 풀릴 것이라 봤다. 그 당시 외국 다단계회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업을 펼칠 즈음이었다. 거기서 착안을 하여 미용실 영업도 다단계적 기법을 이용한 사업구상을 했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공도 거뒀다. 그러나 사업이 성공할 즈음에 전혀 엉뚱한 일로 실패를 맞았고, 교화단은 다른 일에 치여서 더 연마를 하지 못했다.

그런 아쉬움을 안고 살아가던 중 내가 원무를 서원하게 된 것은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교화단 조단법대로 교화를 해보고 싶다'는 서원때문이었다.

<원남교당 / (주)이주넷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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