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전무출신 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
몸 아플때도 교단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당시 부산 당리교당(현 하단교당)에 부임해 3년을 근무했다. 당리에는 대종사가 지정해 놓은 땅이 있었다. 그런데 교정원 재무부에서 매매하라는 통보가 왔다. 땅을 팔고 시내 쪽으로 내려와 교당을 신축했다. 당시 교도회장은 "이 집 팔고 아래로 내려가서 집을 짓고 교화를 해 보자"는 의견이었다. 1층은 어린이집, 2층은 생활관, 3층은 법당으로 짓고 지역사회 교화에 최선을 다했다. 이후 당리교당은 다시 부지를 옮겨 '하단성적지' 수호를 겸하며 교화 활동 중이다.

이후 영암교당과 만성교당을 거쳐 용암교당에 부임했다. 당시 좌산종법사는 "대종사님 다녀가신 집은 헐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 단정하게 잘 고쳤다. 교당 초입에 있어 타지에 나갔다가 고향에 오는 자녀들은 교당을 들러 가곤 했다. 지역 교도들은 "교당에 가서 교무님께 인사는 하고 왔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신심이 장했다. 당시 교당은 초가집이었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비가 세어 지붕개량을 하고 지역교화에 힘을 썼다.

장수동촌요양원에 부임했을 당시에도 좌산상사는 "정산종사님이 머무셨던 곳이니 특별히 나를 보낸다"며 요양원 토지에 수용된 기금 일부를 재무부에서 줘서 집을 고치게 됐다. 교무들이 쉴 수 있는 편리한 공간으로 수리를 했다. 이후 공익복지부에서 문화사회부로 건물 관리부서가 바뀌게 됐다.

해남교당과 효도마을 사은의집, 원평 원심원에서 건강을 보살피며 퇴임에 이르게 됐다. 우연찮게도 부임하는 곳마다 집을 고치거나 신축을 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됐다. 다행인 것은 주위 인연들이 모두 상생의 인연이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향타원 박은국 종사에게 하소연을 했다. 향타원 종사는 "너는 사람들이 잘해주니까 좋겠다"며 인연들을 칭찬했다.

원불교에 들어와 전무출신을 하면서 '힘들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밥을 굶어도 그저 재미있는 세월이었다. 몸이 아파서 누워 있을 때에도 이 교단에 몸담고 살고 있는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모두 내 힘이 아니고 스승님들의 보살핌이었으며, 기도하는 재미로 이룬 사은의 위력이었다.

항타원 이경순 종사는 후진들에게 "너희들은 무엇이 가장 걱정이냐"고 물었다. 당시 여러 가지 대답이 있었다. 항타원 종사는 "후진이 걱정해 주는 선진이 되면 대종사께 불효하는 것이다. 교단에 대한 걱정은 놓고 오직 일원상 신앙과 수행을 통해 각자의 마음을 항복받는데 정신을 쏟으라. 그래야 대종사께 효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간곡한 법문을 해 주었다. 교단에 들어온 지 50년이 넘었다. 그런데 마음을 마음대로 쓰기가 쉽지 않다. 요즘 나의 취사 표준은 '생사자유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생사자유가 되었는가 못 되었는가'를 자문해 본다. 생사와 관계된 일이라면 열심히 하고, '이건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 때면 미련 없이 다 놓아버린다. 어떻게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하는 것을 지금도 챙기고 있다.

선진들은 우리에게 "복이 많아야 전무출신 한다"고 늘 강조했다. 요즘은 후진들 걸어가는 것을 보면 업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난다. 원로교무들의 교화 이야기나 당시의 교당 형편 등을 듣고 교단 100년의 생생한 역사를 잘 이해하면 좋겠다. 그래서 법의 혜명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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