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삶이 재색명리에 그쳐있다면 동물적 삶과 다름없어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영적으로 성장해가야


사람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이다. 육신은 마치 영혼의 옷과 같은 것이라 육신의 수명이 다하면 영혼은 또 다른 삶을 위해 선택한다. 그 선택의 길에는 천상, 인간, 수라, 아귀, 축생, 지옥이 있으나 영적인 가치에서는 천상과 인간 정도가 바람직하다. 그 외의 길은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바람직하지 않거나 제한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영적인 자유다. 존재의 이유를 표면적으로는 행복이라지만 행복은 만족이라는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만족이나 행복은 상대적이고 유연한 주관적 관점이다. 어제의 만족이 오늘의 행복으로 반드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향이 있다. 가치가 높은 곳으로 옮겨 가는 쪽으로 변한다.

행복은 건강, 물질적 풍요, 정신적 자유에 비례하지 않는다. 행복의 척도는 풍요롭고 편안한 조건보다 아주 궁핍하고 불편한 삶의 조건에서도 높을 수 있다. 그러므로 행복 지수를 삶의 질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궁핍하고 불편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장하며 행복의 척도는 떨어질 수 있어도 삶의 질은 높아가기도 한다. 몰랐을 때가 행복하다며 우민화하여 가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조금 더 불편함을 느낄지라도 삶의 가치와 질이 좋아진다면 긴 안목에서는 가치 있는 행복으로 발전하는 모습이다.

동물의 삶은 건강하게 잘 먹으며 종족 번식과 보존에 맞춰졌다. 인간의 삶이 재색명리에 있다고 해도 그것에 그치면 동물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아직 인간 세상의 교육은 삶을 윤택할 수 있는 일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데 가치를 높이 두고 살도록 삶의 방향을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삶이 인간 문명의 발달에 필요한 가치 기준이 될 수 있지만 물질 문명이 필요충분한 곳에 이르면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영적인 가치를 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다. 나아가 우주의 이치와 모습의 진리를 탐구하다가 영적이고 진리적인 삶의 가치로 옮겨간다. 지금의 세상은 물질적 가치에서 영적 가치로 열려가는 초입에 있는 느낌이다.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한국에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과거에도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때는 호기심에 그치거나 생활을 놓고 어디론가 들어가서 도 닦는 극단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생활 속에서 삶의 리듬을 살려가며 영적으로 깨어있고자 노력한다.

깨어있음은 성장으로 발전하다가 이윽고 영적 자유에 도달한다. 하지만 지금은 깨어있음만으로도 행복의 가치 기준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이 기준이라면 천상이든 인간이든 의미가 있고 현실의 삶에서도 그 내용으로 삶을 꾸려간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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