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원기31년 4월28일 전주교당에서 입교한 실타원 오은성(實陀圓 吳恩聖) 원로교무. 전북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에서 출생한 그는 오두산 선진과 일가친척이다. 대종사를 친견한 노천공옥 어머니의 연원으로 입교, 가족 모두가 일원가족이 됐다.

원기43년 출가서원 후 한국보육원, 고창·곡성·임실·청학교당, 교화훈련부에서 순교감으로 봉직했다. 그는 출가서원 후 정읍원광유치원에서 교사로 3년간 간사근무를 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 16년 동안 순교감으로 봉직한 그는 전국의 교화현장을 다니며 어려웠던 초기 교단의 지방 교당들의 실정을 누구보다 진솔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교리강습을 했던 보람에 대해 "당시 법타원님이 교화부장이었다. 순교감 발령을 내면서 초창교당, 농촌교당을 찾아다니며 교화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또 초청한 곳만 가지 말고, 개척교당에 가서 살피고 격려하고 위로도 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교화 초창기 교구나 교당을 위주로 다녔다. 특히 강원도 강릉과 철원을 넘어 그 위에 있는 교당까지 안 가본 데가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의 교통 상황으로는 쉽지 않았음에도 초창이나 어려운 교당은 다 돌아다녔다.

교당 방문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교무들이 아무리 어렵고 가난한 살림에 끼니를 굶는 교당에 살아도 그 처지를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 그러한 상황을 싫어하는 일이 없었다. 오직 교당에 사는 것을 의무와 책임으로 알고, 어떻게든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화를 해야겠다는 그 일념뿐이었다"며 "그때 생각한 것은 '그래, 이렇듯 여기 저기에 교단의 참 주인이 많구나. 이 교무들로 인해 교단의 초기 교화현장의 역사가 기틀을 다지게 되었구나'" 하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어려운 교화현장을 보며 '내가 돈이 몇 억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뿌리고 다니고 싶었다. 교무들이 울고 불고 후회하고 걱정하고 새침하고 그런 것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다만 교당을 새로 건축해야 하는 일, 전세라서 교당을 지을 땅을 산다든지 하는 그런 돈이 없어서 걱정 하지 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돈이 필요한 곳에 무조건 주면 좋겠다는 염원뿐이었다.

하루는 대구 영천교당에 갔다. 그 교당은 집도 아니고 방도 아니었다. 좀 이상스런 방 하나 얻어서 부엌도 없고 마당도 없고 거기에다가 천장에 비닐도 아닌 조금 더 두꺼운 것을 치고 살았다. 그곳이 마당이고 취사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서 10년을 살았다는 것이다. 다른 초창교당을 방문하면서도 놀랐지만 영천교당에 가서는 어찌나 안쓰럽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법회는 어디서 보느냐"고 물으니 "바로 옆에 예식장이 있는데 일요일 예식장을 빌려서 법회를 본다"고 했다. 다른 교당에서 설교나 재를 지내고 거마비를 받으면서 없는 교당을 도와주곤 했다. 또 한 번은 오산교당에 갔다. 교당에 가보니 그 마을에 2층집을 얻어서 주판을 잘하는 딸을 간사로 데리고 와서 그 수입으로 밥을 먹고 살고 있었다. 오산교당이 있던 곳은 교당자리로 마땅치 않아 늘 마음에 걸려 있었다. 집을 사줄 형편은 못되고, 고창교당에 있을 때 인연이 된 교도에게 쌀과 유지비를 조금 얻어서 갖다 준 적도 있다.

늘 마음이 쓰여 하루는 오산교당 교무에게 교당은 어떻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전세를 얻어 이전하기로 했다며 돈이 없어 너무 막막해서 총부에 자금을 빌리러 왔다고 하더라.

당시 총부도 지방교당을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나 역시도 가진 돈이 있었다면 여비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당시에는 그만큼 현금이 귀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선진들은 교화일념으로 모든 상황을 극복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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