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갈 준비 우리는 이미 마쳤지"

▲ 용지인(왼쪽) 어르신과 김광명화(오른쪽) 어르신이 요양원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며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
새 삶이 시작되는 집 제주원광요양원을 2월 초 방문했다. 거센 바람과 진눈깨비가 입춘을 시샘하는 듯하다. 이른 봄맞이를 하려는 동장군의 기세에 옷깃을 여며본다. 제주원광요양원에 입소해 지나온 삶을 회향하고 교도로 거듭난 김광명화(90), 용지인(83) 어르신을 만났다. 제주 안덕면 창천이 고향인 김 어르신은 '제주4·3사건'의 피해가족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 제주4·3사건의 역사도 살펴봤다. 아직도 트라우마를 간직한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차원에서다.

법신불사은님 은덕, 눈을 뜨다

기자의 질문에 제주 방언을 쏟아 내는 김광명화 어르신.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원광요양원 강혜선 원장에게 통역을 요청해야 했다.

아흔의 나이에도 맑은 얼굴에 웃음 가득한 그에게 "자녀는 몇이냐"고 물었다. "오누이를 뒀지.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모두 제주에 살고 있어. 그런데 이젠 아들도 칠순, 딸도 68세로 모두 늙어버렸어. 나 늙는 것은 괜찮은데, 자석들 늙는 것은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애석해서 못 보겠어." 자식의 애칭인 자석들 늙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어 어서 빨리 가야 할 것 같다고 두세 번 강조한다. "이제는 살 만큼 살았지. 고생도 해보고 요양원 와서 호강도 원 없이 했으니깐, 내가 어서 가야지. 아무래도 빨리 가야할 것 같아."

그에게 '갈 준비 어떻게 해 두었느냐'고 물었다.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갈 때 입을 옷이제. 그리고 49재, 내가 가진 재산도 모두 자석에게 물려줬지. 모두 벗어난 것이제. 저승 옷은 뭐니 뭐니 해도 명주옷이지. 버선도 명주로 만들어 놓았어. 요양원 오기 전에 다녔던 절의 스님이 탑다리경 3장을 줬어. 천도와 회향의 의미를 담아 관 위에 놓고 저승에서도 수양을 열심히 하라고. 그것까지 준비했으면 다 한 것 아닌가?"

어르신은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하고 했을까? "원장님이 알려준 그대로 날마다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도 하고 참회도 하고 있지. 내가 한글을 다 깨치지 못했는데, 법신불사은님 덕택으로 교전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어느 날 홀연히 떠지게 됐다. 아주 행복해. 특히 원장님은 나에게 일원의 법을 깨닫게 해 줬다. 집에서 농사만 짓고 살았는데 일원상의 진리를 알게 해 줬다. 또 절에서는 법문만 들었는데, 요양원에 와서 법신불 사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은님은 곧 부처님이다. 늘 사은님 품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니 행복 그 자체이다. 눈을 뜨나 감으나 법신불 사은님을 외우고 있다." 김 어르신은 행복한 생활을 하니 먼저 간 남편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남편은 제주4·3사건 피해자였고, 아들이 세 살 되던 해 열반했다.

지금도 제주4·3사건의 아픔이

평화의 섬 제주에는 아주 해결되지 않은 특별한 아픔이 존재한다. 제주4·3사건이다. 1947년 3월1일 삼일절 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한 것이다.

제주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천~3만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됐다.
▲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에 전시된 증언자의 회고.

기도와 염불로 4·3의 상처 치유

23세에 먼저 간 남편과 결혼한 김 어르신은 "나는 이렇게 오래 살아서 행복한데, 남편은 이 행복한 세상을 살아보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갔다. 그만큼 내가 더 열심히 살아서 자손 번창하기를 기도했다"며 "조상들 몫까지 기도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제주도 사람들 원한을 다 풀어달라고 기도하는 생활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마음을 갖고 살면 제주도에도 평화가 가득할 것이다"고 기도하는 속내를 밝혔다.

김 어르신의 기억 속 제주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제. 집은 다 불에 타고 이리 저리 피난 다니던 어려운 시절. 해변이 아닌 우리 고향이 제일 위험했다. 남편은 5개월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때는 팡!팡!팡! 총소리에 잠을 잘수 가 없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나무아미타불을 되뇌었다.

"절에서 사람 육신은 죽어 없어져도 영은 살아있다고 들었다. 그 말을 명심하고 돌이키고 또 돌이키며 살았다. 그 영을 위해 늘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또 죄짓지 말아야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말을 믿고 좋은 일만 하려 노력했다. 아들 키워 남편 대신 내세우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들 하나 준 거 잘 지켜야 한다는 그 마음에." 그는 아들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잘 키워낸 보람인 것이다.

강 원장은 "지난해 12월에 남편 열반기념제를 지냈다. 그 트라우마가 지금까지도 있었는지. 재를 지낸 후 머리를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 남편이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다. 남편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며 달래는 모습을 한번씩 하게 된다"며 "기도와 염불로 그 모든 상처를 달래고 치료하고 있다. 독경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늘 쾌활하게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어르신은 "요양원에서 수양생활 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일원상서원문 외울 때가 가장 행복한 염불시간이다. 교전 읽으며 공부하고,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니 아주 행복하다"며 "여기서 5년 생활하는 동안 진리자리를 공부해서 알아놓으니 행복함 그 자체다"고 웃음 가득 합장하며 말했다. 제주 법화사에서 10년 동안 공양주 겸 법당지기로 살아 제주도 내에 모르는 스님이 없기도 한 그는 열반 후에도 요양원에 49재를 맡겼을 정도로 행복한 회향 생활의 복락을 누리고 있다.

호스피스 활동, 용지인 어르신

요양원에서 보람찬 노후를 보내는 또 한 명의 어르신이 있다. 용지인(83) 어르신이다. 그의 고향은 서울. 제주에 사는 딸을 따라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 그는 요양원 내에서 호스피스단장으로 활동하며 어르신들의 친구로 활동하고 있다.

"다리가 몹시도 불편할 때 하루는 절에 가니 한 스님이 산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못 쓰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무척 당황했다. '휠체어를 타야 할 몸인데, 그래도 무슨 뜻이 있겠구나'해서 딸에게 전화를 했다. 딸은 어서 오라고, 어머니가 가야할 곳을 다 준비해 뒀으니 내려오라고 했다.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 요양원으로 오는데 한없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산으로 가라는 뜻이 이것이었구나. 처음부터 요양원으로 가라고 하면 안 갈 까봐." 어르신은 요양원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75세에 요양원에 입소해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요양원 내 호스피스단장이다. "누워있는 어르신 곁에 가서 손잡아 주고, 성가를 불러준다. 목탁 치며 독경을 하고 나서 빨리 회복해서 건강해지자고 기도한다. 그렇게 순교를 다니듯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다." 단장이라는 책임을 지게 되니 건강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고….

강 원장은 "매주 일요법회를 마치고 나면 천도재가 진행된다. 먼저간 어르신들 천도재를 지내며 어르신들 역시 자신천도로 늘 회향을 하는 셈이다. 날마다 천도재를 지내며 천도와 인과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러니 어르신들도 어떤 것이 중요한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고 소개했다. 어르신들은 정신이 아득해지면 바로 원장 불러주라고 서로에게 미리 다짐을 받아 놓기도 한다. 입소해서 1년만이라도 이렇게 잘 회향하면 힘들지 않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

어르신들을 통해 법신불 신앙의 위력을 여여하게 볼 수 있는 요양원. 오늘도 일생을 회향하며 참회 반성과 서원 일념의 은은한 독경 소리가 이른 새벽부터 한라산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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