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조실에 계시더니, 때마침 시찰단 일행이 와서 인사하고 여쭙기를 "귀교의 부처님은 어디에 봉안하였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 부처님은 방금 밖에 나가 있으니 보시려거든 잠깐 기다리라"

일행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의아하게 여기더니, 조금 후 점심 때가 되매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거늘 대종사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 그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알지 못하니라.

연원이 되었던 친척 오빠가 처음에 원불교를 설명해주면서 성냥갑을 가리키며 부처님이라고 했을 때 이해가 안 돼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부처라고 할 때 삼천년 전 서가모니부처님이나 사찰에 모셔진 불상만을 알고 있을 시찰단에게 산업부원들을 부처라 하였으니 그 뜻을 어찌 알겠는가.

곳곳이 부처님이요, 우주만유가 죄복의 권능을 가진 부처님이기에 사실적인 불공을 올리라는 주세불의 가르침이면서 법당에 모셔진 부처가 아니라 활동하는 활불시대의 도래를 알려주었다는 생각이다.

과거에는 어른이 최고요, 여자보다는 남자의 권리가 막강하였으며 편법이 득세하였는데 이제 점점 후천의 밝은 시대가 열려가고 있다. 돌아오는 활불시대는 처처불의 시대요, 대종사께서 전망품에 밝혀주셨듯이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활불시대를 맞이하여 성리적으로 활불이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꼽고 싶다.

첫째는 처처불상임을 알고 모든 생명 있는 것을 부처님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현실은 길고 짧고 좋고 나쁘고 강과 약이 분명하다.

이는 무상의 측면이지 유상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임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간, 가정, 사회, 집단적으로 구성원들을 부처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요즘 어린이집 사건과 군부대 사건, 사회의 갑질사태 등의 현실은 빙산의 일각과 같다. 인권이 약한 외국에서의 사례는 수위를 넘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인간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처처불상임을 믿는 관점은 인과보응의 신앙문을 전제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일원대도의 바람이 불어야 하고 종교 간의 합력과 동포들 간의 유대가 이뤄져야 한다.

둘째는 관계성의 인식이다. 정산종사께서 "고기도 작게 볼 때는 낱개의 고기만을 고기의 생명으로 아나 크게 볼때에는 물 전체가 곧 고기의 생명인줄 알게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고기가 물까지 나로 아는 관계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없어서 살 수 없는 대아로서 성리에 바탕한 경외심이 발현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개체로도 충실하면서 대아를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활불이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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