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학문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있듯이 특정 집단에서만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이러한 용어는 한자어가 됐든 순수 한국어 낱말이 됐든 한국 사람이라면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으나 해석을 각자가 나름대로 할 수가 있어서 용어를 만들 때 그리고 사용할 때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더욱 조심스럽다.

우리 교단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써 국어사전에서는 물론이고 원불교 용어사전에서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들 중 최근 교헌개정위원회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용어로 '이단치교'와 '주법'이 있는데 필자는 이 용어들을 접할 때마다 불편함을 금할 수가 없다.

이단치교. 단으로써 통치하고 교화한다는 뜻이리라.

원불교 용어사전은 "십인 일단의 교화단을 조직하여 교단의 통치와 교도들의 교화 훈련을 능률적으로 수행하려는 방법. 이단치교는 원불교의 독특한 교화방법이다. 1917년(원기2년) 7월에 소태산 대종사가 구인제자들로 교화단을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전체 교역자와 각 교당에서는 이단치교의 방법에 따라서 교도들을 관리·지도하며 교화·훈련하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수위단회 규정에서 '이단치교'라는 용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제4장 제16조(상임위원회) 1. 교화훈련상임위원회 가항에 '이단치교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적혀 있다. 이 밖에 교화단 조직 활용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원불교학 연구자들의 소논문에서 이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교화단이 상시훈련의 터가 되고 원활한 의사전달의 통로가 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교화단 조직이 교단 구성원들의 공부와 수행을 진작시키고 교화의 실제적인 기본단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다. 대종사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십인을 단위로 하는 교화단은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할 빠른 방법'으로 '공력은 항상 아홉사람에게만 들이면 되는 간이한 조직'이어서 교화단 법은 분명 우리 교법을 실천하고 전하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데에 굳이 '이단치교'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는 의문이다.

교헌 전문에 '십인일단(十人一團)의 교화'가 언급되고 제12조에 '본교는 십인일단의 교화단을 조직하여 교화와 통치의 원활을 기한다'고 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실천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교화단이 공부와 사업을 잘할 수 있는 상시훈련의 터가 되도록 조직하고 운영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교법실천에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을 하는 것이 더 절실한 일이 아닌가. 우리 교단도 조직으로 존재하는 한 질서 유지를 위해 통치의 개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행정조직상의 통치가 필요한 것이지 교화에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공을 들인다고 하셨다.

정상적인 원불교인이라면 '일상수행의 요법'따라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하므로 통치의 개념이 강조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은에 보은하며 자리이타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어찌하여 '다스리고 가르친다'는 뜻의 '치교'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교화의 방법을 찾아야 할까? 대단히 비원불교적 용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교법을 바로 실천함으로써 바로 전하는 것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말이나 위압적인 표현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교단 행정조직의 통치와 교화가 과연 같은 조직을 통해 구현될 수가 있는 것일까도 의문이다. 교화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수평적 지위에서 '공들임'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교헌 4장 1절 29조에 나오는 '주법'은 원불교 용어사전에도 없다. 국어사전에는 '실체법'을 가리키는 법률용어로 소개되어 있다. 교헌에 '종법사는 교단의 주법으로서 교단을 주재하고 본교를 대표한다'라고 한 것이 '주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를 심심치 않게 만나게 한 듯하다. 어떻게 '사람'이 '법'이 되는가.

<총강분과 특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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