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원기42년 1월1일 대마교당에서 입교한 무타원 이법륜(茂陀圓 李法輪) 원로교무.

나는 기독교 목사가 되기를 서원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빈부귀천의 차별세계'에 대한 의문이 많아 담당 목사와 수없이 의견 교환을 했다. 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원불교 대마교당 출장법회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지일 교무의 '인과 법문'에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기쁜 마음에 즉석에서 출가의 뜻을 세우고 간사생활을 시작했다.

영광교당에서 간사근무 중, 항타원 이경순 종사의 인도로 당시 정산종법사의 진지상을 1년간 받들었다. 음식을 할 줄 몰라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의 지도로 노력했으나 20대 초반의 나는 실수만 연발했다. 실수를 할 때마다 죄송하고 송구해 몸둘 바를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따뜻한 사랑에 힘입어 정성을 다하니 칭찬을 받기도 했다. 예비교무 수학기간에는 '어찌 다행 이 회상 만날 수 있었던가'하는 기쁨과 초발심에 꽁보리밥, 화장실 푸고 나르기, 농사일, 모심기 등 모두가 즐거움이요, 서원 다짐의 활력소였다. 그렇게 서원과 공부심이 움트고 행복한 삶이 이어졌다.

광주교당 부교무 시절에 이성신 교무가 "서귀포에 연원교당을 만들고 와야겠다"고 한 말에 '수화라도 불피한다'는 젊은 혈기로 제주도로 향했다. 서귀포 주민 장인업 씨의 집 전화번호 하나와 담요에 목판 일원상을 싸서 제주 서귀포로 갔다. 그곳에서 4년간 머물면서 아담한 법당을 건축, 30여 명이 입교해 정식 법회를 보는 교당으로 성공시켰다. 법당 건축비는 광주교당에서 전담했다.

이후 남춘천교당에 부임했다. 아무것도 없는 별관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밤이면 떠나야지'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랬다가도 아침이 오면 '살아보자, 굶기를 밥 먹듯 해도 살아있으니 뛰어보자'는 마음을 다지곤 했다. 생명을 걸고 기도에 의지해 현재의 교당 대지를 마련했다.

법당건축과 50여 명을 입교시켰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신심과 서원으로 교당이 설립된 것이다.

동광주교당에서는 20여 명의 교도로 교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연원교당으로 산수교당을 설립했다. 서울 신림교당에 부임해서는 현재의 대지를 마련했다. 당시 신림동은 어려운 지역이었다. 교당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법회에 10여명의 교도가 새로 입교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다. 새로 입교한 교도들로 교화단이 조직되는 등 신바람 나는 교화가 진행됐다. 법회출석이 120여 명에 도달, 계획하는 대로 교당이 운영돼 새 법당 건축 준비에도 최선을 다했다.

부임하는 곳마다 반듯한 법당이 마련된 곳이 없어 실망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내게 일터를 주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감사하게, 기쁘게, 최선을 다해 보자'는 자신과의 약속으로 후회나 원망은 없었다. 오직 지역 환경에 맞게 열심히 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법당 건축의 기연은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반면 부임한 교당 중 해운대교당과 덕진교당은 법당도 있고, 교도들도 있어 안정된 교당생활로 교화를 이뤄갔다.

남춘천교당 법당 건축 시 당시 나는 37세였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 병고에 시달리며 휴무를 수없이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건강이 더 악화돼 교당을 지키면서 교화 현장에서 병고를 이겨보자는 각오로 임했다. 그래서 한 번도 휴무를 하지 않고 교화 현장을 지켰다. 나의 고질병은 치료되지 않았으나 교역자로 쉼없이 살아 온 것이 참 뿌듯하게 생각된다. 교역 후반기를 앞두고 건강을 살피며 조용히 살고자 생각했다. 하지만 교정원 인사이동이 강원교구로 정해졌다. 강원교구는 교화가 너무 열약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설교 교화보다 복지기관 설립 운영으로 방향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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