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이십육년 일월에 대종사 게송을 내리신 후 말씀하시기를 "유는 변하는 자리요 무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성리품의 마지막 장은 게송을 풀이해 주셨다. 대소유무로 나눠 주셨지만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성품의 진체임을 분명히 하셨고 사량으로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깨칠 것을 당부해 주신 소중한 법문이다.

성품이 진공덩어리이기에 생사도 없고 형상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유라고 할 수도 없고 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나 청정한 가운데 원만한 것이 가득차 있어 우주만유를 담아내는 호대한 보자기와 같고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정신력을 벗어나지 않듯이 우주만유를 통해 또 한량없는 그 묘유작용이 다 나타나는 것이 성품이다. 그러므로 성품을 얘기할 때 대소유무로 나눌 수도 있지만 대소유무 그 어느 것에도 빠져서도 안 되고 국집돼서도 안된다. 무릇 상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 하신 금강경 말씀처럼 성품은 진공 속에서만 피어나는 영지를 머금은 꽃과 같다는 감상이다

또한 관조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대산종사께서 반야심경에서 "관은 직관한다는 뜻이다. 물외지물(物外之物) 사외지사(事外之事)를 보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안(心眼) 영안(靈眼)으로 진리를 직관한다는 것이다"고 밝혀 주셨다. 이는 분별주착심을 놓고 직관으로 비추는 것이기에 사량을 붙여서는 안 되며 이 마음이 간단없이 이어질때 관조로써 깨쳐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직관으로 비추는 것이 누구든지 순간순간은 가능하나 그 마음이 이어지게 하는 것은 오직 집중력 있는 일심공부라야 가능하므로 공부의 순서가 집심이 먼저 되어야 수월하게 나아가는 것 같다. 이 공부가 쉬운 것 같으나 성품의 진체를 알기 전, 알고나서도 토가 떨어지기 전에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분별주착과 상에 걸려 있기에 정견을 하는것이 쉽지 않다. 수많은 상의 세계가 의식과 무의식의 저변에 억만 겁을 지내오며 익혔던 습으로 쩔어 있어 법계를 한 계단씩 밟을 때마다 스승의 지도없이 성불한다는 것은 상상이 안된다.

그런데 대종사께서는 스승없이 대원정각을 이루셨다. 우리가 일생을 산다고 하나 다시 되돌아볼 때 어찌다행 이 길을 왔는지 천만다행함을 세월이 지낼수록 느끼게 된다. 어찌다행 이 불문을 찾아와 영생 길을 얻게 되었는지 이끌어주신 대종사님과 삼세 스승님의 대은에 영생을 통해 보은하리라 다짐한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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