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교역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결과 원기88년 화천보은의 집을 개원할 수 있었다. 이어 원기89년에는 춘천효도의 집도 개원했다. 강원도 땅에서 두 복지기관의 개원 과정은 눈물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두 기관 설립에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정현길 교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복지기관을 개원해 운영하게 되니 강원도에서 원불교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민들과 관공서에서 원불교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달랐다. 교도님들 역시 달라지며 교화의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교역 생활을 원만히 마치고 퇴임을 하니 홀가분했다. 초창기 교화현장에서 연속 근무를 하니 힘든 측면도 많았다. 때론 고달프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포기 해야겠다'거나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직 내 근기가 낮고 역량이 부족하여 교화에 큰 성과 이루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다.

신앙·수행 체험담에 대해 부탁을 하기에 몇 가지 밝히고자 한다. 수학기간 중 방학 때면 종법원 식당일에 조력했다. 그해 방학은 종법원에 오지 말고 집에 가 있으라는 명을 받들었다. 집에 있던 중 정산종사 꿈을 꿨다. "법륜아 나간다." 그렇게 두 번을 크게 말씀하셨다. "네가 보이지 않아 내가 왔다. 나간다. 공부 잘해라." 나는 밤중에 대마교당으로 달려갔다. 교당에서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눈이 와서 교통도 두절됐었다. 당시 한정석 교무, 이양신 학생과 함께 걸어서 장성까지 가서 기타를 탔다. 총부에 도착하니 열반 4일째, 조가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발인 준비에 분주했다. 정산종사께서 꿈에라도 찾아주신 은혜로 발인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찾아 주신 은혜에 행복할 뿐이다.

교화현장에서 기쁨이 넘쳤던 신앙 체험은 남춘천교당에서다. 부임 당시 교당은 초창이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부임 후 9일간 라면 3개를 아껴 먹으며 살았다. 낮에는 동네에 가서 대문이 열어진 집에 들어가 도울 일이 있으면 함께 했다. 인연도 맺고 때가 되면 식사도 해결하기 위함에서다. 평소에 지나다니다 마음이 멈추는 집 앞에 서서 '이 집이 우리 교당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막연히 그 집 앞에서 심고를 올렸다. 그런데 그 집이 급매물로 나왔다는 것이다. 기금이 없었지만 그 집을 계약했다. 기적적으로 돈이 마련되어 이사하던 날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간판도 걸 수 있고, 법신불도 모시고 법회도 볼 수 있고, 마음껏 목탁도 칠 수 있어 행복했다. 그 기쁨과 열정은 교화의 활력소가 되어 안정된 교당으로 성장했다. 차츰 교도님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리의 위력을 얻은 수행담은 광주교당 부교무 시절 학생들과 전남 진목도로 봉사활동을 다녀왔을 때다. 일주일간 특별기도를 올리고 목포에서 배를 탔다. 그런데 배가 출발한 후 우리가 배를 잘못 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다음 날 진목도에 도착해 봉사활동을 했다. 7일 뒤 우리는 광주역에 도착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교육청 직원과 교도, 학부모 등 가족들이 현수막을 들고 대환영을 했다. 어리둥절 놀라며 상황을 물었다. 일주일 전 우리가 타려고 했던 진목도행 배가 암초에 부딪쳐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 인명피해가 난 것이다. 만일 우리 일행이 그 배를 탔다면 인명피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도의 위력으로 진리가 눈을 가린 것이었다'며 교도들은 기뻐했다.

당시에는 통신시설도 지금처럼 원활하지 못해 교도들은 특별천도 독경을 하며 우리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 후 기도의 위력에 더욱 관심 많아져 행사를 앞두고는 늘 기도를 하는 습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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