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깊숙이 들어오는 봄길을 걷다

몸보다 마음이 한 발 앞서 봄 마중에 나섰다. 긴 겨울, 혹독한 세파를 견뎌내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이들의 가슴에도 한 발 앞서 봄소식이 희망으로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바람 담아 둘레길에서 전하는 봄소식을 3월 4주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 감사나눔둘레길은 봉우리 하나를 완만하게 도는 8.7㎞ 코스다.

2012년 포항 감사운동으로 생긴
21개 둘레길

구룡포·호미곶 바라보는
고요한 산책

감사 글귀,
시민들의 감사 사연 푯말


초입에서부터 '감사'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첨단과학도시, 산업단지의 도시로만 알고 있었던 경북 포항, '발전'이나 '성과' 같은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도시에 '감사'는 뜻밖이었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감사'가 깃발에 실려 곳곳에 나부끼는 경북 포항시. 이 '감사'와 '나눔'을 테마로 한 감사나눔둘레길에는 이름처럼 따뜻하고 푸근하게 봄이 오고 있었다.

포항 곳곳에 21개가 있는 감사나눔둘레길 중 가장 대표적인 이 길은 이름부터가 그냥 '감사나눔둘레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말목장성 탐방로나 호미기맥은 인근 지명을 가져가 쓴 데 반해, 이 길은 '호미곶'이라고 붙어있되 그냥 감사나눔둘레길로 불린다. 포항시가 옛 청소년수련원을 감사나눔연수원으로 바꿔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는데, 바로 이 연수원에서 둘레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감사나눔둘레길 곳곳에는 발길을 잡는 감사 글귀가 푯말로 세워져있다.

감사로 하나된 포항시

감사나눔둘레길은 둘레길 중에서도 가장 긴 8.7킬로미터로, 호미곶면 변정골이라는 언덕을 두른다. 수련원을 출발해 명월지와 해봉사를 거쳐 강사저수지를 휘도는데, 코스 하나에 산과 바다는 물론, 마을과 저수지까지 걷는 욕심도 많은 알짜배기 코스다.

한창 확장 공사 중인 감사나눔연수원 옆길로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그 입구다. 국내 시군구마다 몇 개씩은 있다는 둘레길 중에서도 '감사'가 들어간 이름답게 푯말이 먼저 눈에 띈다. '행복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을 발견하는 열쇠가 바로 감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는 물론, 명상과 나눔, 긍정, 행복의 길 5개 테마로 이어진 둘레길에선 내내 이같이 문장들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급해지는 발길을 붙잡는다.

2012년 포항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 단위의 '감사운동'을 시작했다.

곳곳에 '감사둘레길'을 설치하고 시민 캠페인을 펼쳐왔다. 매일 감사한 일 5가지 쓰기와 감사 편지쓰기, 전화나 메시지로 감사 표현하기 등을 실천과제로 감사를 확산하는 한편,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감사마인드 교육, 감사불씨 워크숍 등을 개최했다.

이렇게 '감사'가 몸과 마음에 가까워지니 호응도 참여도 높아졌다. 초중고교는 물론, 군부대와 포스텍, 포스코 및 계열사 등이 함께 했고, 읍면동별 단체까지도 퍼져나갔다. 시행 3년, 포항시민들에게 감사는 낯익고 당연하며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 됐다.

'짙은 눈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1.4킬로미터를 살방살방 걸어 감사쉼터에 다다르니 시민들의 감사사연도 만날 수 있었다. 올해로 다섯 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딸에게 쓴 한 시민의 사연이다. "아빠가 치료 받으러 서울에 며칠씩 올라가 있어도 크게 징징대지 않고 '아빠 좀 있으면 온다'며 손꼽아 기다릴 줄 아는 내 딸 나혜, 감사합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가슴 속에서부터 봄처럼 따뜻한 감동이 피어오른다.

푯말에는 잔잔한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고등학교 학생이 쓴 감사에는 "털복숭이 아빠로 인해 온몸에 털이 가득이지만, 그 덕분에 짙은 눈썹을 갖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있어 가는 길 멈춰 한참을 소리내 웃게 한다. "지금 당장 전화 한통이면 그 사람에게 생애 최고의 날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푯말에 핸드폰을 꺼냈으나, 첩첩산중도 아닌데 신호가 안잡혀 황당한 경험도 해본다.

감사나눔둘레길은 이내 완전한 산길로 접어들고 이내 전망대를 만난다. 포항이면 역시 동해바다, 겨우내 과메기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구룡포 너머 멀리 호미곶이 보인다. 마주 본 상생의 손이 갈매기들의 쉼터가 되는 호미곶. '상생'은 우리 교도들에겐 참으로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단어지만, 상생의 손이 TV 여행예능프로그램에 나오면서 그 뜻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단다. '상생'이나 '감사'라는 말이 있어, 둘레길과 호미곶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한편으로는 우리 것을 선점당한 것 같아 야속한 마음도 든다.

'일상수행의 요법 둘레길' 상상 나래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는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 나눔쉼터를 지나 가족마당에 이르면 가족에 대한 감사의 글귀가 많아진다. 봄볕이 따가운 것도 아닌데 콧망울과 눈시울이 시큰하다. 갑자기 나타난 복병 100여개의 계단은 왠지 숙연한 마음으로 묵묵히 밟는다.

포항시가 감사운동을 펼치고, 시간이 흐르며 정착이 되자 다양한 변화들이 생겨났다. 지역 주요단체 워크숍에서는 부모나 배우자에게 전하는 감사편지 낭독이 트렌드가 됐으며, 이 덕분에 참여자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공감한다. 대구지검 포항지청에서는 폭력학생 선도 수단으로 반성문 대신 50개의 감사를 쓰게 하는 대안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

느린 여자 걸음으로 세 시간쯤, 원점으로 회귀하는 감사나눔둘레길은 그 길 안에 희노애락이며 감사와 상생이 다 갊아져있었다. 같은 말이라도 가는 길보다 오는 길에 다시 읽으니 더 와닿는 멋진 마법은 덤이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려 산다 생각했는데 걸어보니 감사할 사람, 감사할 일이 훨씬 더 많았다. 우리 원불교야말로 이런 '감사길' 만들면 참 좋겠다, 내친김에 일상수행의 요법 따라 '정(定)의 길'부터 '공익심의 길'까지 아홉개 만들면 더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던 포항 감사나눔둘레길, 봄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 감사나눔둘레길 전망대에서는 구룡포와 포항의 상징 호미곶 '상생의 손'이 멀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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