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의 구도 역정에 대해 〈구산수기〉는 이렇게 이어 간다. 정산종사 항상 말하기를 "내가 전라도를 가야 내 만날 이를 만나고 공부를 성취하리라"하더니, 기어코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하거늘 부친은 불시(不時)에 토지를 방매하여 진행 차비와 가서 순회 유연(留連, 머물다)할 준비를 해서 백리를 걸어 김천역에 가서 구도의 길을 나서는 청년 아들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구산수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마는 정산종사가 전라도에 와서 먼저 찾은 곳은 강증산교 계통이었다. 가야산에서 증산도 수련인을 만나 기도 체험을 한 정산종사는 증산도 본거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먼저 강증산의 수제자인 차경석(1880∼1936)을 만났다. 차경석은 호가 월곡(月谷)으로 증산교계 보천교(普天敎)의 창시자로 일명 차천자(車天子)로 불린 인물이다. 일찍이 동학운동에 가담했고, 천도교 전남북 순회관(巡回官)을 지내기도 했다. 1907년 강일순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어렵게 차경석을 만난 정산종사가 "이렇게 큰 일을 벌이고 계시다 하니 천하 창생을 위한 천하대사가 무엇입니까?"하고 당돌한 질문을 했다. 이에 차경석은 대답은커녕, "미경사(未經事) 소년이 말만 옹통스럽군"하고 무시를 했다. 정산종사는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닫고 강증산의 부인 고판례(高判禮)를 만나려 했으나 그가 건강 관계로 외인대면을 못하는 처지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후일에 정산종사가 말씀하기를 "내가 그 때 고부인과 인연이 되었다면 내 일이 그만큼 더디어졌을 것이다"고 했다.

고부인을 만나지 못한 정산종사는 정읍군 태인면 대흥리를 떠나 강증산의 가족이 사는 정읍군 덕천면 객망리(客望里, 손바래기)를 찾는다. 이 곳에는 강증산의 부모님과 무남독녀 강순임(姜舜任, 1904∼1959)이 살고 있었으며, 증산의 누이동생인 선돌댁이 친정에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선돌댁은 정읍군 고부면 입석리로 시집을 갔으나 자녀를 낳지 못한 연유로 친정에 와 있었는데 시집댁호를 따서 선돌댁이라 불렸다. 선돌댁은 후일에 조철제(趙哲濟, 1895∼1958)선생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그와 함께 오늘날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의 전신(前身)인 태극도를 창교한 인물이다. 조철제의 법호가 공교롭게도 우리 정산종사와 같은 솥정(鼎)자이다.

정산종사는 선돌댁을 고향 성주로 초청하여 가족이 모두 증산도 수련을 했다. 이 당시 상당한 이적이 나타났었다. 천악(天樂)이 동지(動地)하여 집안에 하늘 풍류가 가득했으나 집 담장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정산종사는 다시 선돌댁과 전라도로 가서 강증산의 부인 고씨도 만나고, 강순임으로부터 선가(仙家) 수양의 비서(秘書)인 〈정심요결(正心要訣)〉을 전해 받는다. 강증산이 사용하던 서재 천장에 감춰져 있던 책인데, 강증산이 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있다가 언제가 그 주인이 찾아오면 주라던 책이었다. 강순임이 그 책의 임자가 정산종사라고 느꼈던 것이다.

강순임은 후일에 그 남편과 함께 금산사 아래에 본부가 있는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의 교주가 되었다. 호가 화은당(華恩堂)이다. 증산법종교 경내에는 강증산 천사와 강순임의 친모인 정씨(鄭氏)부인의 유해를 봉안한 영대(靈臺)가 있다.

원기81년 이곳을 찾은 필자는 정산종사 친척이라 그런지 화은당의 영정을 바라보는 정감이 남다름을 느꼈다. 필자가 생각건대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기전에 증산교 계통을 편력한 것은 진리적으로 〈정심요결〉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정심요결〉이 정산종사의 수양공부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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