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세상 떠날 때 결국 생각의 습관만 남아
수행은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진실로 하는 것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역시 구족(具足)이라'

게송(偈頌)은 선각자가 그 깨달음의 경지를 수제자에게 싯구 형식으로 전해주는 방식이다.

요즘의 의식이 깨어있는 부모가 자녀에게 최소한의 재산만 물려 주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듯, 소태산은 깨달음의 경지를 대중에 남겼다. 과거에는 법을 전할 때 수제자 한 사람에게 비밀스럽게 전하는 단전(單傳)의 방법이었으나 소태산은 세상에 공표하여 지견이 열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 갈 수 있도록 공전(公傳)을 했다.

단전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행세를 하며 혹세무민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아는 것만 가지고는 깨달았다고 하지 못한다. 진정 깨달았다면 깨달음이 삶으로 이어지는 것도 있지만 이제는 삶을 보고 저 사람의 깨달음 정도를 파악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송의 내용을 순서대로 풀어가면, 형상이 지어진 것은 형상 없는 것을 향해 가고 형상 없는 것은 형상을 짓는 쪽으로 변한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없고 또 끝도 없이 돌고 돈다. 그 궁극을 들여다 보면 형상이 있든 없든 모두 텅 비었다. 하지만 이 텅 빈 곳에 우주가 들었다.

인간의 육신은 태중에서 자라나 세상 밖으로 나왔다가 세월 따라 늙고 죽는다. 육신은 우주의 흐름과 영혼이 맞닿아 또 다른 인간으로 지(육체), 수(체액), 화(온기), 풍(호흡)이 모여 성장하며 살아가다가 다시 몸은 지구의 공간 속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영혼은 그 나름대로의 영적 존재로 있든, 인간 또는 동물의 몸에 깃들어 살아가든 한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을 살펴보면, 육신은 몸을 이루는 물질의 성질마저 없는 데에 이른다. 그리고 영혼은 죽지는 않으나 그 기운이 선명해졌다가 희미해졌다가 한다. 영혼의 기운이 선명할 때는 우주를 움직일 수도 있을 정도로 안정된 빛과 포근한 힘이 있으나 기운이 희미해지면 허공을 먼지처럼 정처없이 떠다닌다. 그 근원을 찾아들어가 보면 역시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없는 것에서 만물이 우주의 섭리에 따라 형체를 빚는 것과 영혼의 자아 의지가 맞물려 살아간다.

사람의 마음은 깨어있다 쉬었다 해야 건강하다. 그러나 마음이 깊은 잠에 들어 쉬었다고 해서 지극한 자리에 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잊어서 든 것이라 그 사람 의식의 흐름에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대로 죽게 되면 그 의식이 성품 자리 즉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그 의식 수준으로 영혼의 길을 떠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살아갈 때 생각의 습관과 행동의 습관을 길들이는 게 좋고 떠날 때는 결국 생각의 습관 만이 남는다.

수행을 남에게 보일려고 하지 말고 최소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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