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수도인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며, 생사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며, 죄복의 이치를 알아서 죄복을 임의로 하자는 것이니라."

수도인은 도를 닦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원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도량이고 도덕가이며 종교가이다. 결국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 생사해탈을 하는 공부, 죄복을 임의로 할수 있도록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 종교가이다.

원불교의 공부법은 동정간에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동정일여의 무시선법이다. 세상에 나와서 가장 큰 행복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마음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 경계마다 한마음 관하며 자유로움에 이를 때 선도 악도, 나쁨도 좋음도, 미움도 사랑도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저 변화무쌍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것들을 장중의 구슬처럼 활용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리요.

우리 인류에게 그 자유로운 마음 하나 얻게 하기 위하여 제불제성이 자비희생으로 세상을 살고 가셨다.

생은 사의 근본이고 사는 생의 근본이다. 삶과 죽음이 숨 한 번 들이쉬는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눈을 뜨면 새삶을 얻는 것이요 눈 감으면 죽은 것이다. 하루가 영생이다.

우리의 삶이 언제 어디서나 한마음으로 일관 할 수 있다면, 여여자연하게 지킬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은 변화일 뿐이다. 그러려면 항상 준비공부를 하는데 주의해야 할 것이다.

생사준비, 영생준비를 해야한다. 준비공부는 자연에서 한수 배워야 할 것 같다. 아직도 서리가 내리는 이곳이지만 산에 오르면 진달래 철쭉이 꽃망울을 맺기 위하여 분주하다. 겨우내 땅속 깊숙이에서 얼마나 초롱초롱하게 준비를 하였기에 보란 듯이 기개에 찬 그 모습으로 한겨울을 풍미했던 혹한 추위 앞에 초연하게 당당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대종경〉에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早晩)이 따로 없지마는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하였다. 생사대사! 이같이 큰 문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인과보응의 이치로 우주가 운행되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선악간의 상생상극의 과보를 받은 것이 호리불차이다. 모르고 짓든 알고 짓든 일단 이 원리에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은 한물건도 없다. 영원히 죄복을 임의로 할수 있으려면 삼세의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단순히 죄받고 복받는 기복적인 신앙을 접고 호대한 대도정법에 심신을 담그고 오늘도 내일도 안으로 마음을 비우고, 밖으로 정신·육신·물질로 끊임없이 무념보시를 해야 한다. 그것이 주세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영원한 복의 터전을 마련하는 길이며, 죄복을 임의로 할 수 있는 길이다.

<우인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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