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가 창건되고 원불교는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인기 높은 단체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짧은 시간에 폭발적 성장세를 구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은 전설(?)이다. 많은 선진들께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 이유를 대종사의 위신력 혹은 다생 겁래 인연이라 했다. 매우 그럴 듯한 이야기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식의 이야기를 걱정했던 것이다. 대종사께서 바라신 회상은 상식과 합리에 기초한 건실한 사람들이 가장 건강한 정신과 정성으로 이뤄가는 교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엉을 하고 새끼를 두르지 않은 사람을 탓하시고 일의 떳떳한 길을 두고 오히려 요행한 길을 찾던 제자들에게 경책을 내린 것이다.

초창 당시 조선은 밥 굶기가 예사였고 초근목피로 연명했었다. 196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에르하르트 독일총리에게 무릎을 꿇고 울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1년에 수십 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고 차관을 요청했다. 그러니 일제치하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우리 선진은 한명도 굶어 죽은 사람이 없다. 물론 "아카시아 엿밥으로 밥을 대신하고~" 등의 말씀을 많이 받들었지만 세상은 우리보다 훨씬 더 험했다. 그래서 "불법연구회는 밥걱정 없음은 물론 공부도 할 수 있다더라"라는 소문을 따라 많은 선진들이 불법연구회로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공부하고 여덟 시간 쉬는 참 이상적 단체였다. 세상보다 훨씬 열린 사고와 앞선 의복, 제도, 깨끗한 생활공간, 그러니 출가는 줄을 이었다. 지금 세상은 평균 연봉 수천 만 원이 넘고, 전문직으로 무한한 배움의 공간이 열려 있으며 전통이나 감정에 의한 불합리한 억압은 커녕 너무나 합리적인 인간관계가 대세다. 우리 교단도 그런가? 그러니 출가하는 사람이 없다. 대학, 교육제도 등등에서 원인을 찾고 있어 비정상적으로 무책임한 기숙사를 만들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만약 출가의 길이 빛나고, 가치와 의미가 가득한 보람의 길이라면 비록 등록금을 자기가 내게 한들, 기숙사 생활이 해병대나 특전사 같다 한들 누가 마다하겠는가? 출가 지원자가 줄을 서게 하고 싶은가? 상식적 조직을 만들고 비전 있는 인생을 보여 줘야만 한다. 대종사께서는 일하는 종교를 만들었는데 불과 50년 만에 다시 일 없는 교단이 되어버렸고, 대종사께서는 사회보다 좋은 조건을 제공하였는데 우리는 기초생활수급자보다도 못한 용금을 받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방언 공사는 물론 만석평, 원림농원, 수계농원, 돼지 키우는 일, 엿장사 등 생활의 갖은 일을 하게 했고, 일 없는 여자교무들에게는 전주 고무신공장에까지 보내 일하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에 딱 한 시간 법회로 일생을 보내는 출가도 있다. 그러고서 일하는 교무를 사판이라 빈정거린다면? 재가만 이사병행이 아니라 출가야말로 이사병행이라야 한다. 이것이 불교혁신의 핵심이다. "이같이 한가한 생활 취미 있는 생활 (중략) 그러는 중 부처님의 대도는 묵어지고." 우리가 다시 그대로 반복하면 어찌 새 종교일까! 교무가 낮에는 마트의 계산원이 되면 안 될 이유가 없고, 택시 운전대를 잡아서 안 될 일이 무엇인가? 대종사께서 이런 일에 상을 내는 응산 이완철 종사의 취사를 꾸중한 일화는 이미 익히 알지 않는가. 물론 이런 일이 아니래도 얼마든지 일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타 교단의 사업들을 벤치마킹해 들여올 수도 있다. 출가의 생활을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틀로 만들어 가자.

<정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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