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대공장 설립 꿈꿔
영육쌍전의 새시대 새삶 실현

1979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마친 다음 해에 고려대학교에서의 교육을 시작으로 나의 사회생활은 시작됐다. 이때 나는 두 가지 꿈을 꾸고 있었다.

하나는 원불교 대공장을 설립하여 원불교의 경제기반을 확립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부하며 수도하는 영육쌍전의 새 시대 새 삶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학문과 교육과 수도를 병진하며 살았다.

그리고 10여 년 후, 내 삶에 두 가지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하나는 나의 학창시절에 왕성했던 청년회가 날로 힘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청년회를 부활시킬 것인가 하는 화두를 갖게 된 일이다. 그때 마침 청년회를 부활시킬 내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 서울 시민선방에 청년선방을 개설하자는 제의였다. 이로 인해 교화에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청년들을 가르치는 기쁨으로 이를 극복해갔다.

청년들이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에 큰 신심을 내고 큰 서원을 세우는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다.

그러던 중 원기7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버클리대학으로 1년간 연구년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이 때에 그동안 교화로 밀렸던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학문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이려고 결심하고 도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교화의 개척지로 알려진 샌프란시스코교당의 교화가 매우 어려운 것을 발견하고 교무님을 도와 교화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귀국을 5개월 정도 앞두고 교무님이 교화가 어렵다며 교당을 나에게 맡기고 귀국했다.

그때 샌프란시스코교당에는 5~6명의 교도와 우리 가족까지 10명 정도가 법회를 보았다. 교도회장이 법회에 나오지 않은 지 10년이 되었다고 하여 다시 나오기를 청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우리 집에서 교리공부를 하자고 제안했고, 교도회장은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교리공부를 하고 밤 12시경 귀가했다. 일요일 아침에 교도들 점심을 해가지고 가서 법회를 보고 공양을 한 뒤 오후에는 순교를 했다.

그러기를 5개월간 지속했다. 연말이 되니 법회출석수가 20명이 넘어섰다. 그러자 교도회장이 교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명절대재와 신정절을 함께 진행했다.

그 후 총부에 교무 발령을 요청했다. 현재 미주서부교구장인 양윤성 교무님이 발령받아 왔다. 그리고 난 바로 귀국했다. 학문을 이루러 간 미국에서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해도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때에 나는 미국에서 해외교화의 현실을 보았고, 마음속에 세계교화의 원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학문과 교육, 수도의 병진, 원불교 대공장 설립, 청년교화 부활이란 서원에 하나 더해 세계교화에 대한 염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염원은 청년교화로 이어졌고 그 꿈을 위한 원무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교화 방법은 단순하다. 나의 진심(眞心)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나와 뜻을 같이 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의외로 반응은 좋아서 세계교화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출가서원한 지원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청년들은 내가 원무활동을 해 나가는 목표요, 원동력이다.

<고려대학교 교수 원남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