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러시아 개척한 철인

▲ 모스크바교당은 15일 추모법회를 통해 초타원 백상원 종사의 일생을 추모했다.
일생을 해외교화에 헌신하며 '교포들의 노복(奴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리이타 무아봉공의 삶을 살았던 초타원 백상원 종사. 1941년 부친 백성농 선생과 모친 유삼덕화 여사의 6녀 중 3녀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가정환경 속에서 전주여중, 전주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큰언니 평타원 백기덕 종사의 권유로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정산종사로부터 '상원(想源)'이라는 법명을 하사받은 것은 물론 진지 상을 올리며 조금씩 서원을 키웠다. 원기50년 출가서원을 승인받은 후 재무부 서기와 원남교당, 서울회관 교무로 봉직했다. 이후의 삶은 미국과 러시아가 그의 주 무대였다.

그에게 교단 최초라는 말은 낯설지 않아 보인다. 미국 종교인 비자 발급, 교당 내 한국학교 운영, 뉴욕민속큰잔치 등이 그가 세운 교단 첫 번째 기록들이다. 그가 1973년, 미국 LA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항공 조중훈 사장 내외(원남교당)의 배려로 LA취항 1주년 기념행사 초청인사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종교인 비자에 이어 전무출신 최초로 영주권을 취득한 그는 교당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낮에는 베이비씨터(보모, Baby Sitter), 밤에는 회사에 납품하는 일거리를 맡아 밤낮으로 일을 했다. 집세와 생활비를 교당 유지비로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일터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뉴욕 순교무 자격으로 미국에 들어갔지만 실제 뉴욕 땅을 밟은 것은 LA에서 1년7개월가량 생활하고서다. LA교당과 원불교 해외포교연구소가 합동으로 주관한 '제1회 원불교 국제수련대회'를 계기로 인연들이 모여들면서 차츰 교당의 기반이 잡히자 홀연히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 브루클린에 정착한 그는 한 교도의 도움으로 가게 점원 일을 했고, 재단법인 구성 및 법인등록을 받아 안정적인 교화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다행히 대산종법사의 배려로 상산 박장식 종사와 승타원 송영봉 종사가 교령, 교감으로 발령이 나 원기60년 뉴욕교당 봉불식을 하게 됐다. 30여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었다. 2년 동안 운영해 온 식품점이 궤도에 오르고 또 다른 곳에서 일을 하면서 새로운 뉴욕교당 건립을 염원했다. 하지만 사이비교도의 농간으로 사기를 당하면서 빈 몸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20~30년만 일하면 반드시 일원화의 꽃이 핀다. 사심 없이 일하는 사람을 법신불 사은께서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서원으로 다시 교화를 시작했다.

이후 원기82년 현재의 뉴욕교당을 매입할 수 있었다. 교화 터전을 확보한 그는 상산 종사와 승타원 종사, 이오은 교무와 함께 근무하며 미국교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안정된 미국교화를 뒤로 하고 모스크바로 떠난 것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와 북방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하고서다.

러시아 정부가 종교문호를 열겠다는 입장을 전해 듣고 3일간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고려인을 만나 교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0~1991년 사이 네 번의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종교법인 인가증을 받은 그는 문화재단 '맥'을 설립해 한국문화 소개와 정례법회로 고려인들의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했다.

또한 고려인과 러시아인을 위한 '원광한국학교'를 설립해 문화교류에 앞장섰고, '한민족문화큰잔치'를 매년 열어 교민사회뿐만 아니라 러시아 현지인들과의 교류와 화합에도 힘썼다. 그 공로로 원기84년 대통령(김대중) 표창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 정국불안에서 시작한 개척교화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1999년에는 연건평 1238㎡, 대지 4800㎡ 지하1층 지상 2층의 현재의 모스크바교당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바교화가 안정기에 접어들 쯤 그는 또 다시 미국 보스턴(2001) 교화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 교화의 큰 그림이 그려지면서 원기91년(2006) 미국 현지 미주총부추진위원장에 발령받아 본격적인 미주총부 원다르마센터 건립에 매진하게 된다. 그렇게 부지선정 작업부터 행정절차 등을 밟으며 총력을 다한 결과 현재의 원다르마센터가 완성됐다. 초대 미주총부법인 이사장을 맡아 정진적공하다 원기98년, 퇴임한 후 미주총부법인 교령으로 주석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천신만고(千辛萬苦) 함지사지(陷之死地)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렇게 작은 철인으로 살아오던 그는 13일 오후4시 뉴욕교당에서 거연히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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