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창평교당 첫 법회 후 만타원 권일경 창립주로부터 교당 설립의 내역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의 과정이 있어 감나무 집을 무료로 빌려 줘 교당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창립주 교도의 말을 듣고 '저축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의식금이 들어오면 교금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저축했다. 또 가을에 감이 익으면 입찰을 해 감을 팔아 저축했다. 유지비도 없는 교당이었으나 3년을 모으니 당시 돈으로 30만 원이 되었다.

창평면은 옛날부터 국가 사회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 양반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교도님 중에도 일찍이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신심 깊으신 교도님들이 계셨다. 창평면은 14개 마을이며 그 옆에 대덕면이 17개 마을 정도였는데 그곳에도 교도님 몇 분이 계셨다.

처음 창평에 부임해 3간 집에서 야학도 했다. 또 마을마다 권일경 교도와 순교도 많이 다녔다. 교리강습은 공타원 조전권 종사님을 모시고 했다. 법당이 협소해서 마당에 마을 덕석을 빌려다 깔았다. 교도님들은 마당에 앉고 법사님은 2간 마루에서 강의를 했다.

교도들이 첫날 강의를 듣고 집에 가서 어떻게 소문을 내고 선전을 했는지 그 이튿날에는 갓 쓴 어른들이 많이 오셨다. 입교를 많이 시켜 더 시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주일 동안 강습을 신나고 재미지게 났었다.

이듬해부터는 완공된 법당에서 모든 행사도 하고 결혼식장으로도 많이 애용했었다. 그리고 마을마다 향당 어른들이 원불교에 신심이 있어 지도해 주므로 초상 장례도 원불교 예법으로 혁신하게 되었다.

창평에서 원불교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나이 30세에 창평교당 교무로 가서 훌륭한 재가 어른들을 만나 보람 있는 일도 하고 좋은 인연들을 만나서 기쁨도 컸다. 만 9년을 사는 동안 전무출신도 네 명이 나왔다. 고진양·이도기·고효근·심양원 교무다.

원기60년 여수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교당에 들어섰을 때 건물 방향이 잘못 앉은 느낌이었다. 여수교당은 교화를 시작한 지 10년이다. 막상 부임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교화 상황이 못 미쳤다. 그래서 먼저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새벽기도에 교도 몇 분이 꾸준히 나와 정성을 함께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도를 마치고 6시만 되면 머리에서 땀이 나면서 천지 분간도 못하게 어지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고 나면 낮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괜찮았다. 기도를 시작해 1년째 되는 어느 날 밤, 꿈에 대산종사를 배알했다. 대산종사는 "니가 목적하는 그집 말고 진남관 옆에 이러한 집이 더 좋다"고 알려줬다. 다음날, 시청 재무과에 다니는 남제 송도민 교도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교무님 진남관 옆에 이러한 집이 나왔는데 그 집을 안 사면 대종사님 법이 아무리 좋아도 안 다닐라요"하고 강하게 말했다.

요인 주무 7명에게 전화해 교당에 모여 상황을 이야기하고 그 집으로 가봤다. 꿈에 본 그 집이었다. 교도들에게 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옛날부터 이 집은 이름난 김참사가 지은 집이라 소문나 있었다. 교무 마음에는 무척 좋았으나 교당 형편상 가당치도 않았다. 주무님들 역시 "참 좋네요. 그러나 너무 엄청나네요" 하고 마음을 내지 못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하며 다시 의견을 모았다. 결국 '그 집을 사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어느 요인 하나 연락이 없어 다시 요인들을 소집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