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마상전급 승급조항을 실행하면 드디어 법강항마위에 승급할 수 있다.

법마상전에서 법(法)과 마(魔)가 서로 싸우는 전쟁터였다면 법강항마(法强降魔)는 마가 항복 하고 법이 이기는 평화의 시대다.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쓸 때 걸림이 없고, 대소유무의 이치가 한눈에 들어오며 인간의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게 된다. 내용만으로도 엄청난 단계이다. 급에서 위로 오르는 것은 성위(聖位)-성인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이고 교무님. 저는 이번 생엔 보통급만 하겠습니다. 제가 갈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나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억지로 참아야 하잖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성인과 부처의 참 의미를 모르는 말이다. 내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참으며 겉으로만 편안해 보이는 삶이 아닌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의 삶이 곧 부처의 삶이며 성인의 삶이다.

모두 그러한 삶을 꿈꾸지 않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우린 부처다. '에이. 제가 어떻게 부처에요. 기분 좋아라고 하는 말이네요.' 경계 따라서… 법과 마의 줄다리기에 따라서 때론 부처도 때론 중생도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보통급, 특신급, 법마상전급 계문으로 묶은 습관을 고쳐가며, 생활 속에서 수양, 연구, 취사의 삼학공부로, 인과보응과 불생불멸 진리가 있다는 법문을 들으며 공부해 왔다. 하지만 경계를 만나면. 진리 따로 나 따로. 따로 국밥이다. 미운놈은 미운놈, 이쁜놈은 이쁜놈이다.

왜 그럴까? 내가 '나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다, 저렇다, 맞다, 틀리다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멍~ 하고 살아야 하는가? 나의 관념과 업에 물든 시선인 아닌,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곧 성리(性理)로 보는 것이다.

성리는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원리이다. 부처의 마음을 회복하고 나의 관념과 상을 깨기 위한 열쇠다.

대종사께서는 수도하는 사람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가 되라고 하셨다.(성리품7장) 막상 '성리'라는 말을 들으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입니다.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 차 나 한잔 하시지요.' 라는 선문답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말장난 하는 것인가? 정말 이런 이해 안되는 말을 해야만 부처가 되는 것일까?

대종사께서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글 한 수를 써주시며 '변산구국로에 석립청수성이라 무무역무무요 비비역비비라' 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하셨다.(성리품 11장)

"아. 믿었던 대종사님 마저…"

<김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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