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교화 어떻게 살릴 것인가
선방은 교법사회화의 최적

원무활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서울청년선방이었다. 선방을 통해 청년교화와 새삶회 활동을 전개해 교법을 사회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학 4학년 때, 나는 원남교당 청년회에 처음 나갔다. 원남교당 청년회는 출석회원이 40여 명 되는 잘 나가는 청년단체였다. 그러나 내가 학업을 마치고 일반법회를 보기 시작할 때부터 전국적으로 청년교화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의 화두는 '청년교화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였다.

나는 침체 원인을 교법으로 무장하지 않은 청년들이 정치 현안 등 현실 문제에 치중해 있기 때문이라도 판단했다.

원기77년 서울청년연합회장단이 청년교화 부활을 위한 청년선방 개설을 요구해서 나는 서울시민선방에 청년선방을 개설했다. 신도안, 완도에서 대산종사를 모시고 받든 법문을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정전〉을 실생활에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시민선방 원장인 교무는 선 공부를 가르쳤다.

선방은 밤10시가 되어서야 끝나는데도 청년들은 집에 가려 하지 않았다. 청년들은 시민선방 원장과 나를 스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 선방 부교무인 유도성 교무가 서울대 대학생교화를 맡으면서 서울대생들이 선방을 찾아 더욱 활기를 띠었다.

선방식구들은 원기80년 수계농원에서 대산종사를 모시고 여름 첫 훈련을 가졌다. 50여 명가량 되는 청년·대학생들이 첫 훈련을 가진 것이다. 이 훈련은 새삶회 훈련으로 합쳐져 1년에 두 번 하계·동계훈련으로 진행돼 지난 1월 40회를 맞이했다.

훈련은 그 당시 종법사위에 계셨던 대산종사와 좌산법사를 모시고 진행했고, 최근에는 여름은 좌산상사를, 겨울에는 경산종법사와 원로스승을 모시고 한다. 훈련을 통해 배출된 전무출신이 40여명, 원무가 3명, 정토회원이 7명이다. 나는 이러한 일들이 내 힘만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승의 법력과 총부의 기운이 응해서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서울시민선방과 교구 청년교화담당교무들이 힘을 합하면 청년교화는 부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8년 전부터 시민선방에 교무가 계속 발령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바람에 청년 5~6명이 여름·겨울 훈증훈련, 어린이새삶마음공부캠프, 하와이국제훈련, 원학습코칭, 새삶회원 관리, 새삶회지 발간까지 다 맡아서 하고 있다. 학업과 직장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기획부터 실행까지 빈틈없이 모든 일을 해나간다.

서울청년선방을 개설한 후 처음 10년은 발전기였다면 그 후 10년은 고전기였다. 교구나 교단의 관심이 멀어진 상태에서 교무도 없이 원장과 청년들이 모든 것을 해나가려니 힘에 겨워, 그동안 많이 나오던 전무출신 지원자 수도 줄고 있다.

하지만 최근 서울청년선방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5년 전 청소년국과 선방청년(새삶청년)들이 원학습코칭을 합동으로 개발·확산·보급시키면서부터다.

올해는 시민선방에 양성덕 교무가 발령받아 청년들이 감격해 했다. 양 교무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 많은 일들을 다 알아서 처리하는 청년들을 보고 전사라 부른다. 대부분 여성들이라 여전사라 부른다.

일원대도를 이 세상에 선양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일하는 전사들과 교무의 힘이 합쳐지면 청년교화는 날을 기약하고 꼭 다가올 것으로 믿는다. 그 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염원해왔다.

<고려대학교 교수원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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