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급히 모인 여수교당 요인들에게 나는 "제가 가만히 생각하니 여러 요인님이 아무 말씀도 없으니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결국 여러분들이 희사로 정해서 하고 권선도 해 오셔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없었던 걸로 하자고 모이라고 했습니다"는 속내를 밝혔다.

이에 박일경 주무는 "교당 불사가 뉘 집 아기 이름도 아니고 거대한 원불교에서 그래서야 됩니까" 하니, 김월정 주무도 "그렇습니다"고 대답했다. 요인들의 의견이 '모두 그래서는 안된다'고 뜻이 모아졌다. 결국 요인들이 먼저 희사금 동참의 뜻을 밝히고 각자 인연 따라 권선을 받아보기로 했다. 교도들은 밍크 행주를 파는 등 다방면으로 불사모금운동이 진행됐다.

당시 손충현 회장은 남농 선생과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남농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4대 작품을 빌려 여수 광주은행 3층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소품은 희사를 받아 판매해 불사에 보탰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현재 살고 있는 교당이 매매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당시 부회장인 지안과 지정익 원장에게 사유를 말하고 현 교당을 매입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지 부회장은 "우리 집사람(서원경 주무)이 서울 다녀오면 타협해 보겠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했다. 서원경 주무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사실 부회장 입장에서는 그 집이 필요 없었다. 또 돈도 없어 은행에서 빚을 내 매매가 성사된 것이다. 교당 불사에 관한 고민과 문제들은 교도들의 지혜와 합력에 바탕 해 하나하나 진행돼 갔다.

중도금 치룰 돈이 없어 광주은행에서 일반대출을 받은 일, 당시 대산종법사로부터 신문에 싼 불사금을 하사 받은 일 등 완불하기까지의 과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큰 은혜였다. 또한 교당 수리비 1천만 원도 최준근 교도가 단독으로 맡아 희사했다. 박일경 주무는 봉불식 공양 준비부터 경비 일체를 맡아줬다.

이렇듯 모든 일이 순서 있게 이뤄졌다. 특히 고비가 있을 때마다 밝은 지혜가 솟았고, 일 따라 교도들은 자진해서 보시심으로 합력했다.

당시 여수교당 고진양 부교무가 보좌를 참 잘해줘 감사했다. 이렇듯 상등(上等) 인연들 만난 덕에 8년간의 교화가 대성황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휴무를 생각했으나 순교감 직책을 받아 1년간 순교를 했다. 원기70년 군산교당 교감으로 발령을 받았다. 20년 전 부교무 1년밖에 살지 않아 다시 인연지가 된 것 같았다. 군산은 유난히 교회가 많은 고장이라 교화가 쉽지 않았다.

송순봉 교무 후임이었다. 당시 교도들과 매월 2천원씩 모아 남군산교당 자리를 마련해 놓기까지 했다. 땅 절반은 남군산교당에서 어린이집을 경영하도록 하고, 절반은 경장교당 유치원을 마련했다.

유치원 집 지을 기금이 없었는데 우연히 교도도 아닌 한 사람이 특별천도재를 지내고 8년 아팠던 병이 일주일만에 나았다.

또 남편은 강사에서 전임교수로 진급, 딸 둘은 기관지가 나빠 병원을 사흘만에 다니는 등 고가 많았는데 병도 나았다. 1년 후에는 아들도 낳았다. 천도재 하나로 한 가정의 고가 다 풀린 것이다.

그 사례를 본 교도들과 인연들 사이에서 천도재 열풍이 불었다. 어느 날은 하루에 각각 다른 재를 5번씩이나 지내기도 했다. 교도들은 "각자가 앓고 있던 심신간 애로가 다 풀렸다"며 경장교당도 내고 유치원 개원도 어려움 없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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