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불가에서는 스승과 제자사이에 성리 문답을 통해 견성인가를 내렸다. 소태산대종사는 동·하선이 끝날 무렵 제자들과 문답을 통해 성리 공부를 독려했다. 〈대종경〉 성리품이 성리에 대한 가르침과 문답, 실생활에 활용토록 하는 법문을 모은 것이다.

과거에는 성리를 언어도단의 입정처라 하여 말로써는 나타낼 수 없고 격외법문으로 진리를 전하였으나 대종사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리지만 말로써도 능히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행동으로써도 나타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대종경〉성리품 6장)

이제 다시 성리품 11장을 보자.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변산 아홉구비 꼬부랑 길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으며 또한 없다는 것도 없으며, 아니고 아니며 또한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무슨 뜻인 줄 알겠는가? 여전히 모르겠다면 함께 공부해 보자. 성리공부를 하기 위해선 먼저 이것이 진리를 깨치는 공부이고, 인생에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공부임을 자각해야 한다. 곧 우리의 자성(마음)이치와 우주의 근본이치(대소유무)를 알아 해결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경전을 통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 역대 부처와 조사들의 공부법과 말씀을 참고하며 일원상의 진리, 의두요목, 성리품 공부를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좌선과 염불에 취미가 생기고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세 번째는 일상생활에서 성리에 바탕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에도 성리에 바탕하여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에 대한 연구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곧 일상에서 체험하고 실천하며 성리와 내가 둘이 아님을 체험토록 노력한다.

대종사는 어려서부터 '왜 하늘은 높고 파랄까? 구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왜 부모님은 저렇게 친할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하고 아무 소득 없는 의문이다. 하지만 하늘에 대한 의심과 인간 세상에 대한 의심은 결국 커다란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물음표를 가지는 연습을 해보자. 항상 그렇다고 생각한 것들에 왜? 라는 질문으로 바라보자. 요즘 말하는 창의력이다. 도무지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의무요목과 대산종사 대적공실법문을 참고하자.

대산종사는 교단 100주년을 성리공부로 준비하라고 법문을 내려 주셨다. 화두나 의무요목을 매일 적당한 시간 연마한다(좌선 후 의두연마 시간 5분).

화두는 이것저것 여러 개를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골라 오래토록 연마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늘 스승의 지도와 감정을 받는 것이 중요함을 잊지 말자.

성리공부를 통하여 결국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자유로운 부처의 삶을 살고자 함이다. '나'라는 관념과 상을 놓고 큰 우주가 되어 바라보자. 성리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요, 진리를 향한 나침판이다.

<김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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