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가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귀의함으로써 대종사의 최초 구인제자 그러니까 구인선진이 완성됐다.

대종사는 먼저 택한 여덟 제자에게 마지막 한 사람의 합류와 그의 존재적 가치를 누누이 강조한다.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일이 허사가 된다"

"우리가 만나려던 사람을 만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도다"

대종사의 구인제자 중 여덟사람은 다 스승과 동향인 영광 사람들이다. 유독 한 사람, 정산 송규만이 경북 성주 사람이다.

대종사는 고향인 영광 길룡리를 떠나지 않고 구도하고 마침내 대각을 이루었으며, 새 회상 창립도 고향땅에서 시작을 한다.

인류 역사상 기존의 성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가장 어려운 제도사업이 자신의 출생지에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릴적 성장 모습을 다 지켜본 고향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최초 여덟제자만 하더라도 대부분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고 친척이다. 육산 박동국은 친동생이고, 오산 박세철은 나이는 많지만 집안 조카이며, 칠산 유건은 외숙이다. 팔산 김광선은 이웃에 사는 의형제와 같은 사람이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등은 다 이웃 동네의 벗들이다.

일산 이재철은 비교적 떨어진 군서면 사람인데, 사산 오창건의 인도로 대종사 문하에 들어왔다. 방언공사 등을 진행할 때 영광군청을 상대로 외교를 해야 할 것을 예상한 대종사가 사산 오창건에게 영광 유지 가운데 한 사람을 천거할 것을 강력히 요청을 해서 대종사의 뜻을 받들기 위해 발탁한 인물이 일산 이재철이었다.

일산 이재철은 영광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식견과 인품을 가진 유지였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 이후 방언공사가 진행되고 간석지 개척 허가관계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능숙한 역량으로 이를 원만히 해결한 사람도 일산 이재철이었다.

일산 이재철은 대종사와 동갑으로 대종사 보다 먼저 태어났으며, 대종사가 열반한 계미년(원기 28년, 1943년)에 대종사보다 뒤에 열반을 했다. 그러니까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열반하는 특이한 인연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이 귀의하기 전부터 여덟사람을 상대로 저축조합운동을 벌여 자본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숯을 사서 되팔아 큰 돈을 마련했다. 그 돈을 기본으로 방언공사를 진행한 것이다.

방언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대종사가 정읍 화해리를 직접 찾아 수제자 정산 송규를 법하에 인도한다. 정산종사는 후일에 이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은 사은이지만, 나는 오은(五恩)이다. 대종사가 정읍 화해리까지 친히 찾아오셔서 나를 맞이한 친영(親迎)의 은혜를 하나 더 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천 배, 만 배 보은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방언공사를 마친 후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를 비롯한 구인제자에게 법인기도를 명하여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루었고, 이후 초기교단 창립사에 구인의 대부분이 익산 총부 건설과 교화 현장을 개척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다.

교단 창업기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의 아홉제자는 그야말로 스승을 향한 불이(不二)의 대신성으로 순명하는 성직의 삶이었다. 구인제자 가운데에는 스승의 법통과 종통을 계승한 수제자 정산종사가 있고, 외교와 경제에 밝은 일산 이재철, 공심 제일인 사산 오창건, 최초 견성 인가를 받은 삼산 김기천이 있으며, 가장 허물이 없이 다정했던 팔산 김광선이 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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