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원기40년 4월10일 진영교당에서 입교한 미타원 임남열(彌陀圓 林南悅) 원로교무. 조실부모로 사업하는 오빠네 가족을 도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친구들이 공부한 책을 빌려 독학을 했다. 취미가 독서라 <원효대사>를 비롯한 위인전과 청춘극장, 탐정소설 등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읽혔던 책을 틈만 나면 독파했다. 친구들과 만나면 소설속의 주인공을 소재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친구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책을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더 신이나 많은 책을 읽었다.

친구들은 매년 동창회를 하며 인생문제를 논하며 밤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했다. 나는 평생 공부만 하고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도를 깨치면서 살고 싶었다. 친구들은 나를 가엽게 여겨 만날 때마다 설득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부터 인생무상에 빠졌던 것이다. '이차돈' 연극을 보며 진영교당으로 구경 다니다가 학생회와 일반법회에 나가게 됐다.

어느 일반법회에 초량교당 향타원 박은국 교무님이 인과법문을 설했다. '모두가 전생에 지어 이생에 받게 된다'는 말씀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법회를 보며 '나도 교무가 되어 인과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진영교당 정양선 교무님을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혔다.

교무님은 "공부를 좀 하고 가자"며 〈수심결〉을 밤마다 가르쳐 주셨다. 참으로 뜻이 깊고 재미가 있어 출가서원을 굳건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밀양교당에서 간사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밀양교무는 이태연 교무였다. 당시 견산 손진경 (효산 손정윤 원로교무 부친) 교도회장이 밀양읍내에 2층 양옥 적산(200평) 집을 사서 교당 간판을 걸어놓고 총부에 교무 파견을 요청했다. 총부에서는 배치시킬 교무가 없어 요양 중이던 태연교무를 보냈다.

교무님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태연교무는 매일 정복차림을 하고 밀양 영남루 다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고 누구요" 하고 물어 주기를 기다리며 인연을 만났던 것이다. 나는 견산 교도회장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쌀이 떨어졌다고 말씀드리면 한 가마니씩 들여 줬다. 또 나무가 떨어지면 한 수레 가득 실고 와 창고에 넣어주셨다. 신심과 공심 장한 교도회장이었다. 넉넉하지도 않은 사가 살림이었으나 교당을 위해서는 온통 바치는 훌륭한 분이셨다.

나는 초발심이라 열심히 교무님 시키시는 대로 순교도 하고 학생들 성가도 가르쳤다. 법회 때는 30여명 교도님들 공양도 해드리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교무님은 건강이 약해 늘 편찮았다. 어느 때는 경상도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 내가 옆에서 통역을 했다. 법회 때는 사회도 보며 부교무 역할을 한 셈이다.

청년과 학생들이 드나들자 교무님은 "머리를 올려야겠다"며 그때부터 머리를 올리고 살았다. 밭농사도 배우며 재미있게 살고 있던 어느해 추석, 태풍이 불어 닥쳤다. 밀양 시내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다. 2층 법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옆집에서 큰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이미 교당은 배를 띄울 정도로 물이 차 버렸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서 피난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무님은 총부 쪽을 향하여 정산종법사님과 아버님을 부르며 '죄송합니다'라고 절을 했다. 나는 '출가를 결심하고 도망 온 한 중생에게 크게도 시험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순간 교무님은 "기도하자"며 법신불일원상을 떼어 가슴에 안고 기도를 했다. 교무님은 "우리는 떠내려가도 법신불을 모시고 가면 살 것이다"며 나를 안심을 시켰다.

드디어 비가 멈췄다. 뒷집 변전소 청년교도가 지붕 위로 사다리를 놓고 밥을 배달해 줘 몇 끼니 만에 허기를 면했다. 3일째 되는 날 물이 빠져서 내려와 보니 벽장 속 쌀, 이불, 옷이 모두 황톳물이 들어서 못쓰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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