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태풍 피해는 한 달 이상 매일같이 치워도 끝이 없었다. 수해소식이 전해지자 진영, 대구, 부산, 마산 교무들과 교도들이 원조를 해 많은 도움이 됐다. 수해정리가 끝나자 교도회장은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며 총부 중앙선원으로 보냈다. 졸업 후 전주교당 부교무로 부임했다.

둥근형 법당에 교도는 300명이 넘었다. 법회 전에는 시장 속 같이 와글와글했다.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학생회, 청년회, 금마교당, 교동교당 출장법회 등 하루에 초상은 보통 5~6명, 장지에서 돌아오면 또 열반하셨다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힘들었으나 바로 초상집을 따라 나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1년을 살고 나니 힘든 가운데 익숙해져서 살만했다. 하지만 박제곤 교무의 인사이동으로 나도 대전교당으로 인사이동을 했다.

대전교당은 균산 정자선 교무께서 제원·금산·추부·대전교당을 차례로 개척하고 대전교당으로 오셨다. 유성도 장차 개척할 계획이었다. 당시 교도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교도들이 기성계를 조직해 소방도로 옆에 큰 집을 사서 옮긴 처지였다. 매월 곗돈이 들어가야 해서 기성금을 월요부터 토요일까지 걷으러 다녔다. 날마다 교도님과 집집마다 혹은 시장 상점에도 다니다가 식사 때가 되면 교도 댁에서 점심, 저녁까지도 먹고 올 때가 많았다. 교당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교도와 상의하라고 할 정도였다. 신심, 공심이 최고인 그 분은 현재 대전교당 여타원 박인전 법사다.

교당 기성계는 교도들의 희사만으로는 충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당에서 하숙을 했다. 제원교당 교도회장 자녀 남매와 추부교당 교도회장 자녀 남매를 교당에서 하숙을 시켰다. 날마다 도시락은 4개씩 싸야했다. 교무님과 아이들이 한상에서 식사를 했다. 아버지와 자식처럼 아이들도 어려움 없이 살았다. 학생들 도시락 반찬이며 뒷일이 만만치 않았으나 당시 간사(이진훈 원로교무)는 모든 일을 어른스럽게 잘해서 나는 큰 덕을 보고 산 셈이다. 매사를 교무님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교무님은 사무나 법회 보는 것을 늘 자상하게 가르쳐 줬다.

대전교도소로 1주일 한 번씩 법회를 갔다. 나도 따라 가서 성가를 가르쳤다. 전국에서 대전교도소에 재소자들이 제일 많다고 했다. 법회 때는 불교신자들이라 하여 200여명이 나왔다. 여름에는 땀내가 코를 찌를 정도다. 나는 그 사람들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열심히 성가를 가르쳤다. 나중에는 혼자만 다녔다. 홀로 몇 개월을 다니면서 설교와 성가를 가르치려니 힘들었다. 이후 교무님이 교도소 법회 그만해도 된다는 말씀으로 안나가게 되었다. 그 대신 학생·청년법회에 정성을 다했다.

청소년들이 몇 명씩 불어나서 재미있게 노력하며 교화했다. 어느 날 교무님께서 "부교무가 아무래도 폐에 병이 생긴 것 같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몇 차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힘들어졌다. 혹시나 하고 혼자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봤다. 폐결핵 초기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찾아온 것이다. 당시만 해도 폐병이라면 모두가 무서워하는 때였다. 특히 어린 학생들도 있고 전염을 염려하여 주위에서 요양을 권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살겠다고만 했다. 교무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다. 얼마나 부교무가 딱했으면…. 참 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부산 온천수양원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곳에는 추천교무님(덕타원 정양선)이 수양원장이셨다. 인연이 참 묘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