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들에게 출가동기가 있다면 원무들에게는 원무 지원동기가 있다. 내가 원무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오직 무아봉공만 있을 뿐 교단으로부터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나이다'라는 기도에서 시작됐다. 인연관계로 보면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서울 한남동 수도원에서 우리 회상의 법랑인 구타원 종사를 모시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구타원 종사는 회상창립 유공인 1,756인의 역사집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운이 좋게 그 일을 돕게 되었다. 그때가 원기64년이다.

소태산대종사께서 재세 시에 구타원 종사에게 자주 부촉한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저 처녀들이 늙으면 어쩔 꺼나. 창립 유공인 역사를 써라"는 두 가지 당부였다. 이는 정녀들의 노후대책(수도원)을 강구하라는 말씀이었고, 영모전에 봉안할 창립 유공인의 역사와 영상을 잘 기록하라는 뜻이었다. 대종사께서 100년 안에 이 회상에 들어온 인연들은 내 수첩에 적힌 사람들이라고 한 말씀의 본의는 제자 사랑에 대한 남다른 표현이지 회상 창립한도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한다.

대종사께서는 1대를 36년으로 정하고, 12년씩 3회로 나누어 1대 3회를 우리 회상 창립한도로 잡았다. 구타원 종사의 수도원 부지 매입과 창립 유공인 역사 기술에 대한 열정은 가히 하늘을 뚫을 만했고 그에 대한 준비도 철저했다. 창립유공인 1,756인의 개인적 특성 등이 정리되어 초고로 완성됐다.

이를테면 일산 이재철 선진에 대해서는 '근동에서는 봉사가 만져 봐도 양반이란 칭송을 들었다'라고 기술했고, 사산 오창건 선진은 '만덕산에서 대종사님을 시봉하면서 마을에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 지게에 지고 골짜기를 올라올 때 해가 저물면 위에서 대종사님의 "그~ 창건이냐?" 하시는 음성이 골짜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면 그냥 힘이 나서 날듯이 올라가곤 했다' 등이 그 예이다.

원기37년, 교단은 제1대 성업봉찬 역사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원기60년 초반까지도 완성을 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급기야 글을 잘 쓸 수 있는 재가청년 한 사람을 구하던 중 내가 그 그물에 걸렸다.

1973년 군 제대를 하고 경상남도 시행 농조직 5급 재무직에 합격하여 6년째 근무하고 있던 차였다. 소위 사회에서 잘 나가던 청년 최봉은의 인생이 가난의 질곡으로 빠져드는 출발점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1년여를 쉬기는 했어도 7년간 구타원 종사의 말씀을 받들어 메모를 하고, 그 정리된 원고를 가지고 삼동원과 완도를 찾아다니며 대산종사께 감수를 받았다. 그 노력 끝에 원기72년에 원불교 창립유공인 1,756인의 역사를 완성했으니 그 기연이 원무를 지원하게 된 동기라 할 것이다.

"봉산님 같은 분이 왜 전무출신을 서원하지 않으셨어요?"라고 가끔 묻는 교도들이 더러 있다. 그 질문을 받을 때면 구타원 종사님이 생각이 난다. "교단의 중요한 역사를 완성해야겠는데 출가들을 데리고 일을 하면 조금 하다가 공부하러 간다고 가버리니…"라며 당시 한숨 섞인 독백을 하는 모습을 봐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구정선사의 신성과 처옥자수(처는 감옥이요 자식은 간수라) 법문은 귓전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해주면서 나에게 출가는 권하지 않았다. 대신에 묵산 장학금으로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원불교학을 전공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렇게 구타원 종사와는 출가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약속을 했고, 나는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왔다. 되돌아보면 구타원 종사에게는 출가 재가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남부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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