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 임남열 원로교무
결핵 치료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병원을 찾아다녔다. 어느 정도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료가 되자 교화훈련부에서 입교 업무를 맡았다. 이후 반백년기념사업회에서 출납을 맡았으나 근무하는 동안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던 일도 많았다. 결국 동지 교무와 상의한 결과 교당 교화로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수원교당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수원교당은 법타원 김이현 교무님이 종로교당에 근무하면서 안양교당을 개척하다가 다시 수원교당에 출장법회 중이었다. 한옥을 얻어 교당 간판을 걸었는데도 교도는 7~8명이 나오는 초창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서울 신촌교당 교도들이 가끔 쌀을 가져다 줬다. 하루는 쌀이 떨어졌는데 말을 못하고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말이 나오지 않아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교무님은 쌀통을 열어본 후 "쌀이 없으면 말을 해야지 그냥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꾸중했다. 그러나 교당 형편을 뻔히 아는 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교무님은 당장 앞집 가게에서 쌀 한말을 사다 쌀통에 부었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당시 수원교당은 학생과 손님이 자주 찾아와 쌀이 많이 소비됐다.

교무님은 자주 법회를 보러 다녔다. 때로는 부산에 사상 강연회도 갔다. 출장을 갈 때마다 내게는 순교를 시켰다. 그리고 다녀오면 순교 보고를 했다. 갔던 집을 또 가고 갈 곳이 없으면 교도 친구 집에라도 다녀와 보고를 했다. 어려운 가운데 교무님은 날마다 순교를 하고, 요가도 하고, 단체 관광도 했다. 법타원님은 시민회관에서 사상강연회 및 각산 신도형 교무님을 모셔다 강습도 났다. 당시 간사였던 최승원 교무는 골목마다 어린이들을 모아 유년법회를 봤다. 법타원님은 어린이법회는 최 간사가 최고 잘 본다고 칭찬했다. 점차 남자 교도들이 불어나 교도회장 선출도 하는 등 발전의 기운이 돌았다. 그런데 건강이 또 나빠져 순교도 마음대로 못하게 됐다. 교무님 걱정만 끼쳐드리는 것이 아닌가 마음속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다시 1년을 쉬고 부산 구포교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구포교당은 최법용 교도회장이 구포지역 유지로 목재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교도회장은 신심이 깊어 단독으로 교당을 지어 교도들이 부담 없이 교당을 다니게 했다. 교당에 손님이 오시면 자갈치 시장에 가서 싱싱한 생선을 사다 대접을 하고 여비를 챙기는 등 정말 특별하신 분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부임한 교무들이 환속하거나 혈압으로 열반하는 등 연고가 자주 발생했다.

그 일로 교도회장은 마음이 많이 불편했고, 교도들도 주춤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 교도들 순교를 다녔다.

순교를 다니면서 경상도 억양인 내게 많은 호감을 보여줬다. 열심히 순교를 해 교당에는 다시 활기가 돌았다. 50~60명 교도들이 법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병이 났다. 1년 후 진찰 결과 결핵이 대장으로 내려가서 대장암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부교무와 상의하여 부산 개인병원에서 6시간에 걸쳐 대수술을 했다. 교도들에게는 총부에 갔다며 비밀로 했다.

장기간 교무가 보이지 않자 교도들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야단이 났다. 결국 부교무가 고백을 하고 회장님 이하 교도들이 섭섭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이 수술결과는 좋아 회복이 잘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교무가 맹장수술을 하게 되었다. 간단한 수술이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후로도 몇 번을 했다. 부교무가 병원 갈 때마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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