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회, 예지원, 봉공회 역사의 산 증인

대적공의 생활로 일관하는 안경일 교도.

"단돈 1000원이 없던 시절, 부산서부교구 봉공회장직을 제가 맡게 되었습니더. 당시 저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사양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우예하겠습니까. 그리고 마땅히 봉사할 것이 없던 당시 대외적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대한적십자에 원불교봉사회로 가입을 했습니다. 참 열심히 봉사하러 다녔습니다. 교무님~."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그의 경상도 사투리는 높고 낮은 억양에 따라 한마디 한마디가 경쾌했다.

지금도 1993년 3월에 발생한 부산 구포역 열차사고 당시 달려가 봉사했던 기억이 선명하다는 서면교당 안경일(88) 교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사고현장에 내려왔었지예. 열심히 봉사하는 우리들을 보고 어디서 나온 사람들이냐고 묻습디다. '적십자 원불교봉사회' 누구라고 말했죠." 이렇듯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원불교를 앞세우며 대외 봉공활동을 쉬지 않았다. 당시는 봉사단체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부산시에서도 행사만 있으면 적십자 원불교봉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참, 상도 많이 받았지예."

이제 그는 10년 전 모든 활동을 놓고 지리산자락 함양에서 대적공의 노후 정양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남편 박원심(91) 교도가 늘 함께 한다.

영생서원을 밝히며
"저의 친정은 기관지 계통의 지병을 가진 단명가(短命家)예요. 5남매였지만 모두 작고하고 지금은 막내인 저만 이렇게 살아있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늘 생각했던 것이 '과연 내가 원기100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겁니더." 다행히 그는 남편과 자녀들의 지극정성 간호로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작은 아들에게 약속도 했다. "내가 만일 원불교100년성업 기념대회(2016년)에 참석할 수 있는 명(命)이 주어진다면 그 때는 반드시 엄마 손을 꼭 잡고 함께 참석하자." 작은 아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운명인가 숙명인가 평생을 봉공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이루는데 몸 바친 삶이었어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인간의 삶을 넘어선 초인간의 삶을 살아온 것처럼 내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와졌다 싶을 정도입니더. 그 당시에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그는 인생 80세 고개를 넘길 때 '이제는 도의 맛을 진정으로 보고 덕의 바람을 불리면서 생사문제를 해결할 때가 왔다'고 통감했다.

미수를 맞은 올해 그는 영생 서원을 밝혔다. "다음 생에는 전무출신 할 겁니다. 호산은 다음 생에도 또 만나자고 하지만 나는 출가할 겁니더. 그럴라고 내가 매일 기도방에서 얼마나 적공의 생활을 하는 줄 아십니꺼." 그가 소리 높여 구수한 사투리로 서원을 더욱 다졌다. 그때 옆에 있던 남편이 말했다. "그라믄 내는 어쩌라고. 헐 수 없제, 그 교당 교도하믄 되겠네. 그렇게 하면 다시 만나지겠지. 안 그렇습니까 교무님." 한바탕 웃음소리에 5월의 햇살이 거실을 환히 비췄다.

교구 각종 단체, 선두주자
원기41년 입교한 그는 당시 서면교당 초대교무였던 김대현 교무의 설교노트를 지금도 갖고 있다. "법회 마치고 오면 교무님 설법을 노트에 다시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입교한 그때부터 법문사경이 시작 된 것이죠." 역대 교무들의 설법노트를 보관 중이다.

그의 기도방에는 적공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대산종사가 종법사위에 오른 후 낸 원기48년 신년법문 '대도선양의 길'부터 33년간의 신년법문을 붓 펜으로 사경한 노트가 있다. 노트 제목은 '스승님'이다. 어디 그 뿐인가. 좌산상사가 종법사위에 오른 후 발표한 원기81년 '가난 극복의 길' 신년법문부터 12년 동안의 법문, 경산종법사의 신년법문도 정성을 다해 사경해 놓았다. "스승님들 법문사경 노트가 제 보물 1호입니다. 법문 사경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들이 발행하신 책, 전서, 십상 등 시간 날 때마다 사경하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교무님, 지난해 여름은 어찌나 무덥던지 더위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이성택 교무님이 강의했던 〈금강경〉 강의 본을 노트에 다시 사경했습니다. 참 새롭게 다가옵디다." 억센 손으로 붓만 들면 쓰여지는 예쁜 글씨들은 그의 마음의 칠보 중 하나라고 한다.

그의 책꽂이에는 특별한 또 한권의 노트가 있다. 25년간 써 온 생활일기 노트다. "전에 김일상 교무님이 저에게 부산교구 봉공회 연혁을 빼달라고 하십디더. 그 오래된 것을 어찌 합니까? 하고 생각해 보니 제가 갖고 있는 10년 일기가 있어요. 그것을 보며 연혁을 하나하나 정리했습니다." 그는 부산교구 봉공회의 산 역사요 증인인 셈이다.

교구 봉공회 이전에도 그의 활동은 대단했다. 원기59년 교구 내 '어머니합창단'을 창설, 합창단원 98명을 통솔하는 단장으로 활동했다. 전국 새마을 어머니 콩쿨대회에 출전해 1등의 영광을 안았다. 당시 상금 300만원을 그 자리에서 새마을 사업에 쾌척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1987년에는 적십자사 원불교봉사회 가입, 1995년에는 부산서부교구 봉공회장을 거쳐 부산교구로 통합될 때 교구 봉공회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교구 내 '독경반'을 조직해 교구 및 교당 천도재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지금은 '원경회'로 거듭 발전했다. 또한 부산교구청 내 '예지원'을 개원해 지역사회 문맹자들에게 한글교실을 열어 교육사업에도 온 정성을 다했다.

여기가 극락일세
지리산 자락 함양에서 극락생활을 하는 그. "여기서는 사람 구애받는 것도 없고 경종 크게 친다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습니더. 도시생활에서처럼 소리 내지 못하는 벙어리 기도도 안 합니다. 제 맘대로, 성가하고 싶을 때는 큰소리로 노래 부릅니더. 구애가 없이 아주 자유로운 일과를 하니 그나마 건강이 보존되는가 싶어예."

깔끔하게 손질한 마당은 남편의 작품이다. 그 정갈한 환경에 독경과 사경으로 법의 거름을 더해 주니 집 주변 초목들도 푸르름으로 더할 나위 없이 무성하다.

"교무님 전에는 좌선할 때는 가끔 잡념도 났거든예, 근데 요즘은 사경할 때나 좌선할 때도 잡념이 모두 사라졌어요. 사경을 집중적으로 하고부터는 일심적공이 일관됩니다. 그렇게 점심 전까지는 선심으로 사경만 합니다." 그는 기관지확장증이 재발되지 않도록 온 불공을 다하는 중이다. 호흡을 조절해 활동을 하다 보니 온 하루가 선심일여로 일관되는 것이다.

"이래 인생 말년에 편히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저 양반 덕분이지예. 물론 사업실패라는 큰 경계를 줘 내를 이렇듯 고생시켰지만 알고 보면 '은생어해(恩生於害)'이지예. 원기100년인 올해는 몸 조절하면서 법회 무결석을 목표로 했습니더. 서면교당과 함양교당을 오가면서 꼭 개근을 할 것입니다." 그의 목표는 확실했다. 거실에 걸린 남편의 법문 전각 작품처럼 삶 전체가 온통 반질반질하다.

"교무님, 언제든지 연락만 하고 오이소. 친구 데리고 오면 더 좋습니더." 20평도 되지 않는 작은 집, 그곳엔 신앙수행으로 가꾼 참다운 보배가 가득했다.

손글씨로 사경한 노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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