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원교당은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40만원이었다. 월세 중 진해교당에서 10만원을 부담하고 30만원은 내가 부담했으며 매주 수요일 밤 법회를 보기로 했다. 나는 용원교당의 교화의 기본 목표를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과 '무시선 무처선'으로 잡았다.

그리하여 전지크기의 게시판을 교당 외벽에 설치하여 정전 '불공법'과 '무시선법'을 주단위로 교대로 게시하고 책상을 활용하여 교화용 리플릿 등을 비치했다. 법회 설교는 주로 일원상의 진리를 중심으로 견성법을 위주로 했다.

곧 반응이 왔다. 첫 입교자는 집주인인 박도일·조성원 부부였다. 후일 선경, 인경 두 딸을 입교시켜 일원가족이 됐다. 인경이는 내 아내가 담당해준 피아노 반주를 맡아 법회조력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다음 입교한 교도가 용원도서관에 부탁을 해서 원불교 관련서적을 열람용으로 비치했는데 이 인연으로 맺어진 지장과 현도 교도다.

진해교당 잠자는 교도로서 교당의 위치 선정 등에 자문을 해주던 신양원 씨는 경영하던 치킨점이 팔리면 교당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신 남부민교당 교도인 옥보인·여금호 부부를 소개해 용원교당에 나오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 강수연 씨도 입교시켜 신심 있는 교도가 되었다. 정말 고맙고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중에 예전 원광지에 소개된 송은심·문은규 부부의 입교이야기를 살짝 소개해 보려고 한다. 일요예회보를 편집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네, 원불교 용원교당입니다." "거기 가려면 어떻게 가면 되나요?" 하고 묻는다. 그는 원음방송을 듣고 교당을 검색해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송공덕 교도다. 그는 두 번째 예회에 참석하는 날, 입교식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전화가 왔다. "원무님 입교식 그거 다음에 하면 안 되나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뒷말이 이어졌다. "남편하고 같이 하려고요"라고 했다. 순간 나는 "아이고 사은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했다. 2주 뒤, 부부는 입교식을 했고, 꽃다발을 안은 두 사람은 활짝 웃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출석모범교도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타 교당에서 전입해온 이인선, 김중선 교도, 친구를 돕겠다고 부산교당 법회에 나가면서도 아내와 딸과 함께 법회에 출석해 주는 정종덕, 조윤진 부부 등 선교소였던 용원교당이 어느새 교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5년 후 후임 교무와 인계인수를 하게 됐다. 당시 용원선교소는 교당으로 승격됐고, 나는 다시 부산 목요시민선방을 창립하여 정기훈련 11과목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용원교당 개척과 경남교구 교리대학 학장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원기94년 일반부문 교화대상을 받았다.

용원선교소에 수요정례법회를 보는 한편으로 김해 우원산업에 매월 1일 사내 법회를 보았다. 기도와 설교, 성가를 식순에 넣을 정도로 사실상 찾아가는 교당, 찾아가는 법회였다. 그렇게 즐겁게 교화를 했지만 문제는 교도들의 성적관리였다. 공부성적은 차치하고라도 출석성적이나 공금 등 사업성적을 올리고 싶어도 원무의 행정권한으로는 제약이 많았다.

심홍진 교무가 있을 때는 출석현황과 유지비수입 등의 명세서를 매달 한 번씩 보고해서 교당교도로 올릴 수 있었으나, 교무가 바뀐 후로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 1년 만에 한 번 올릴 수 있었다. 법회 운영이나 공문서 처리 등은 독자적으로 행해지면서도 신심 있는 교도들의 출석이나 헌공금 등의 성적을 올릴 수 없었으니 원무로서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자식을 굶기는 부모의 심정이었다. 교단 행정체제를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남부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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