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토요일 소년원 법회를 보았다. 그런데 애들이 너무 떠들고 설교를 듣지 않아 화가 났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신' 얘기가 나왔다. 나는 "문신은 없어 보이는 애들이 좀 있어 보이려고 하는 것이지" 라고 말했다.

]순간 한 명이 인상을 찌뿌렸다. "와! 말 참 저 따위로 한다. 없어 보이는 애들이 문신한단다. 그럼 내가 없어 보이는데 있어 보일려고 하는 애라는 거네, 아! 열 받어." 당황스러운 상황이 설교 중에 일어났다. 애들은 팔뚝을 걷고 윗옷을 벗으면서 용, 호랑이 문신을 마구 드러내려고 했다.

나는 생각과 행동을 잠시 멈췄다.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을 저렇게 맞받아치나 하는 원망심도 일어났다. 좀 더 멈추니 문신한 애들을 무시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게 됐다. 문신한 애들은 철 없는, 어리석은 애들이라고 폄하하는 '분별성과 주착심'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미안하다. 잘못된 말이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그리고 소년원 법회의 실수를 일요일 청년법회에서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법당에서 법신불 일원상 부처님께 사죄의 기도도 올렸다. 〈정전〉 심고와 기도에서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는 사죄를 올리는 기도를 올리라'고 했다. 대종사께서는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으로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을 아울러서 말씀하셨다. 어떤 경계든지 항상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내 '마음'을 공부 주제로 삼는 마음가짐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는 일상수행의 요법 9가지를 대조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무시한 '문신'을 통해 소년원 아이들의 마음을 만났다. 그리고 청년법회에서 내 실수를 고백함으로써 배움과 가르침은 하나로 어우러졌다. 여기서 배움과 가르침의 태도는 열심히 배워야 한다, 가르쳐라는 당위적 명령이 아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기쁨과 재미가 있는 것이다. 배움과 가르침을 즐겨하는 것이다. 마치 불보살들이 마음을 세우고, 제거하고 돌리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즐겨하듯이 말이다. 이게 일상수행의 요법에서의 '잘 배우는 사람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를 동시에 실행하는 공부인의 마음가짐이다.

소년분류심사원 법회와 소년원 법회에서 더욱 겸손해지는 마음이 생긴다. '내가 너희들을 안다'라고 단정 짓지 않고, 먼저 물어보고 아이들의 말을 잘 들으며 공감해야 겠다는 마음이 세워진다. 어찌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통하면 신뢰가 자리한다. 신뢰가 생긴 뒤에는 어떻게 말을 해도 마음으로 듣게 된다. 이를 심심상련이라고 한다. 이때에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을 진정한 사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고, 대종사께서 밝히신 스승과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가정에서, 교당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나부터 심심상련의 심법으로 잘 배우는 동시에 잘 가르치는 공부를 하고 있는가, 또한 배우고 가르치는데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가 돌아보자.

<과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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