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리석을수록 남의 잘못이 크고 중생심이 깊을수록 자기만 생각한다. 또 안목이 좁으면 주어진 경계가 딱 그러해야 마음에 들고 약간만 준비가 덜 되어 있거나 불편한 것이 있으면 불만이 생긴다.

그러나 성인에 가까울수록 자기나 남의 잘못은 없어지고 선을 생각하게 된다. 안목이 넓으면 모든 여건이 다 은혜가 되고 다 마음에 들며 준비가 없어도 모든 일들을 추스려 가며 제도 사업이나 교육 사업이나 교화 사업들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교육이든 교화든 사업이든 유능할수록 기회는 더 잘 보이고 남들은 포기할 때 오히려 기회가 나타난다. 그러니 수많은 성자들이 범부에게는 보이지 않는 눈을 얻고 한번 시작한 일은 도무지 포기가 없이 계속하여 반드시 결과를 얻고 불과를 이루며 한량없는 중생들의 희망이 됐다.

여기서 무슨 고담준론을 나누고자 하는 바도 원칙론만 강조하고자 함도 아니다. 우리는 원기100년을 이미 맞이했고 이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눈앞에서의 일들을 해 가야 한다. 시장이 반찬이고 필요가 발명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는 교화에 목마르고 법을 갈구하는 입장에 섰다. 대종사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면 우린 모두가 배고프다. 무슨 조건이 어렵고 부실함이 있겠는가? 사람도 있고 교법도 있고 회상도 있다. 하자고 하는데 안될 일이 무엇이고 하는데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 마음이 부처인 줄을 확연히 알지도 믿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소위 무능이라는 것이 내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게으름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며 업력들이 나를 방해한다고 여기게 된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나머지 가능성을 만들어 가면 되지 않겠는가?

이소성대라 한 번에 하나씩만 되어도 우리는 해낼 수 있고 오히려 열 번에 하나씩만 이뤄져도 우리는 해낼 수 있다. 정말 안되는 것이 앞을 가로막을 때 좌절이 생기겠지만 인과는 순리를 따라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고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이다.

사람을 사랑하면 교당은 살아난다. 우리는 부처가 아니라 중생을 교화하려 하는 것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그 대상이다. 안 하려고 하면 비난이 일어나지만 하려고 하면 이들이 다 내 복전이라고 수없이 들었다. 교무가 교도를 비난하거나 교도가 세상 사람을 비난하면 안된다.

교화를 위해 학위를 얻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끊임없이 연구를 한다. 특히 나이가 어릴 경우 이런 경향이 심하고 나 역시 그런 환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실력이란 게 뭔가 사람을 좋아할수록 교화에 유능한 사람이고 단점 잘 보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정성스러울수록 위력적인 사람이며 늘 기도하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 아니던가?

자리가 명예로 보이면 배은자이고 그 상황파악조차 안되면 무능한 사람이며 어딘가 무엇엔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며 끝없이 새 길을 찾는 사람은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면 가장 평범하고 한결같은 마음이 심력이라는 것을 꼭 나이가 들어서야 알아지는 것일까?

나 말고 상대를 위해 말하는 사람, 나 말고 앞에 있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 이 마음이 보살심이다. 사람 사랑하고 사람 모이는 교당이 되게 하자. 이것이 성공의 가장 빠른 길이고 최고의 방법이고 완전한 일이다.

<정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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