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1년을 요양한 후 새롭게 창설한 서면원광한의원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공익부장은 "경상도에 오래 산 남열 교무가 갔으면 좋겠다"고 몇 번을 권했다. 조용한 농촌교당에 근무하고 싶다는 나의 작은 소망도 놓아야 했다. 첫 개업이라 한의원에는 손님이 없었다. 한의사와 일요일마다 교당에 가서 법회도 보고 침 치료를 했다.

이후 이리보육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하루는 보육원 정문 앞에서 아이가 심하게 울어 나가보았다. 6~7세 아이들을 놓고 간 것이다. 당시 김서오 원장은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이제 이곳이 너희 집이다. 울지 말고 잘 살고 있으면 부모님이 오신단다"하며 "아이들을 방으로 안내하라"고 일렀다. 당시 아이들은 원장을 "아빠"라 부르며 달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오냐, 알았다"하며 인자한 모습으로 사랑을 베풀었다.

이러한 사랑에도 아이들은 가끔 문제를 일으켰다. 나는 시에서 나온 과장에게 '아이들 용돈'에 관한 건의를 했다. 평생 아이들 엄마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에서 나온 용기였다. 부모가 있는 집 아이들은 용돈이 있어 학교에 가서도 군것질을 약간씩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불편함을 호소했다. 이후 시에서 아이들 앞으로 얼마간의 간식비와 교통비가 책정됐다. 김 원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오성수 원장은 아이들 명의로 된 통장을 개설했다. 아이들 스스로 저축하는 방법을 깨우쳐 앞길을 열어 갈 수 있는 희망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유아부터 초·중·고 학생 150여 명과 법회를 보면서도 마음공부로 올바른 인성을 기를 수 있게 정성을 다했다.

모현교당으로 발령 난 후 첫 교화 활동은 순교였다. 교도 가정방문을 빠짐없이 했다. 교도 명단에 체크를 하며 방문했다. 그리고 날마다 교도 가족들 명단을 부르며 얼굴을 익히고 기도로 교도들 기운을 모았다. 교도 댁에 청소년이 있으면 당시 안세명 부교무도 같이 방문했다. 그렇게 유년회·학생회·청년회 교화를 해 청소년법회도 잘되어 갔다. 매월 1~2회 부교무도 일반법회 설교를 했다. 때로는 부교무와 나누어 신입교도 및 교도 법위훈련으로 공부를 향상시켰다. 교당 젊은 부부들은 법회 후 등산팀을 꾸려 등산을 꾸준히 진행했다. 그 덕분인지 단원 간 법정이 두터워지면서 단회도 순조롭게 되어갔다.

이제 수도원 생활을 한 지도 어언 9년여 세월이 흘러간다. 대종사님 밝혀주신 법 아니셨더라면 어찌 병마와 싸웠던 긴 여정에서 살아남았을 것인가 싶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 남은 시간 은혜와 감사로 대적공의 삶을 살고자 기도한다.

내 인생에 있어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 그것은 물러섰던 신심을 챙겨 다시 교당에 나오는 교도들을 볼 때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뻤는지 모른다. 대종사님 법대로 열심히 교화하니 그렇게 응답을 하는 것이었다. 또 구두쇠로 소문난 교도가 어느 날 보시하는 방법을 배워 보람을 느낄 때, 가족끼리 불화하여 늘 지옥 생활을 하다 대종사님 법문을 받들고 감화되어 화평한 가정을 이뤄 공부심이 깊어가는 교도들을 볼 때도 교화의 재미가 진진했다. 하지만 평생을 통해 활발하게 하고 싶은 교화를 크게 이뤄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도원 주변에 5월의 초록이 우거졌다. 내생에 어떻게 해서든 이 도량에 다시와 대공심으로 이 회상의 큰 일꾼이 되어 보겠다는 염원이다. 몸이 약하지만 낮에는 한 번도 누어보지 않았다. 다음 생에는 대종사님 혈심제자가 되어 동원도리하겠다는 기도를 하며 하루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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