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무아봉공만 있을 뿐 교단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는 나의 소신이자 사실상 원무를 지원하게 된 동기다. 그러던 내게 원기99넌 2월 부산울산교구 사무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에게 "봉산님, 교당 근무를 좀 해 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근무사령을 내주거나 행정권한을 부여해 주지 않으면 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 아주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을 전했다. 그 연유에는 용원교당에서 원무의 행정권한 제한으로 교도들의 출석이나 유지헌공 등록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 남아 있어서일 터, 아무래도 맺힌 게 많았나 보다.

그날 교구에서 나의 조건을 들어준다고 답을 해왔다. 나는 3월12일자로 인수인계식을 하고 주임교무가 아닌 소위 주임원무로서 상주하며 근무를 시작했다. 그곳이 웅상교당이다. 웅상 지역은 내가 영산성지학교 교사로 있을 때 뜻있는 어느 교무와 함께 교당을 개척하겠다고 교화계획을 덧붙여 처음 원무를 지원했던 곳이다. 하지만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 내가 원무의 자격을 갖추어 주임교무의 소임을 맡게 됐으니 '사람의 지극한 서원에 진리가 응하는 이치가 이렇게도 소소영령한 것이로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아니나 다를까 총무부에서 정식 사령을 해주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고, 원티스 행정 권한도 부여해 주지 않았다. 사무국장이 사령 권한과 원티스 권한 요청을 했지만 총부에서 거부했다.

그때부터 생활관이며 교당 관리 인수인계는 받았고 발령은 나지 않았으니 역할은 주임교무 역할이지만 행정권한은 남부민교당 교도로서, 웅상교당 사무원으로서 등록돼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한적으로나마 웅상교당 교도들의 출석이나 헌공 등을 그날 그날 등록할 수 있었으니 1년 후 연장근무에 대한 교구의 물음에 내가 무슨 말을 했겠는가. 오직 무아봉공만 있을 뿐 교단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서원이자 원무 지원 동기가 또 한 번 증명된 셈이다.

1년을 웅상교당에 상주하며 주임교무의 소임으로 근무한 나의 근무성적은 남부민교당 교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즈음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구타원 종사께서 연말결산을 할 때, 시봉진 교무들보다 내 성적을 많이 매겨 주니 어느 교무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때 구타원 종사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남았다.

"너희들은 회상 돈으로 공부했고 봉은이는 자기 돈으로 공부하고 와서 근무하고 있지 않느냐"며 근무성적을 남들보다 후하게 주었다. 그런데 그 성적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나는 웅상교당 교도들과 참 재미있게 1년을 살았다. 일요예회와 수요선방, 즉문즉설로 법의문답하고 칠판판서로 설교를 하며 최선을 다해 일원상의 진리를 설파했다. 그동안 재정은 흑자로 돌아서서 교구지원을 받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교당이 되었고 나도 용금을 받기 시작했다. 그 보람과 기쁨은 원무 재사령을 받게 했고, 아들 법륜이 출가서원을 하여 현재 상사원에서 간사근무 중이다. 남부민교당, 부산목요시민선방 또한 여일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교단으로부터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남부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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