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옳다고 믿었거든 '사즉생' 정신으로 일관하는게
모두를 살리는 대도가 아닐런가
'망아진아현'의 굳은 서원과 실천 함께 나투자

아직도 우리사회는 '세월호'가 드러낸 그간의 깊은 환부에 대한 성찰과 치유를 놓고 많은 고뇌와 갈등을 거듭해 오고 있다. 언제쯤 속 시원한 해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나라가 온통 침몰위기상황이라며 '국가개조'를 부르짖던 그 '눈물의 약속'도 간 곳이 없고,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무정견한 지도층의 상황인식과 소아적인 시비이해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국정의 혼란상은 날이 갈수록 긴 탄식과 한숨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고 걱정들이다.

혹자는, 역사란 그러한 모순과 갈등을 통하여 정과 반의 매듭들을 아우르고 상생과 공존의 관계를 이루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너그러운 포용의 지견을 자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 그 끝을 모르는 모순과 부조리, 대립과 갈등만을 더해가고 있는 우리의 시대상황은 결코 안심하고 믿고 따를만한 언덕을 찾을 수가 없다.

많은 국민들은 부실하고, 무능하고,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우리사회 지도층의 행태와 가치정서를 실로 깊은 실망과 걱정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요즘, 돌아가는 세간의 일과 인심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한다.

요즘 들어 부쩍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청산에 들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도대체가 마음 편한 구석이 없으니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는 얘기들이다. 특히, 요즘처럼 눈과 귀를 아프게 하는 주변의 소음들을 들으면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교단에서도 새로운 변혁과 발전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초미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 왔었다. 특히, '교헌개정특별위원회'는 경산종법사의 '원기100년의 약속'이란 혁신적 법문에 고무되어, 그리고 수위단회의 적극적인 결의와 뒷받침으로 가히, '오늘을 새롭게, 내일을 희망차게' 교단의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주는 듯 했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최근 들어 별다른 진척이 없어 보인다. 혹, 당초의 개혁의지가 저 세월호의 '눈물의 약속'처럼 안개 속의 용두사미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낳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특위'의 '성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읽었었다.

혁신이란 문자 그대로의 환골탈태의 결단과 결행이 따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혁신과 혁파란 다 그만한 필연적 인과와 당위에서 출발하고 귀결되는 게 아니던가. 하여, 우리는 정당한 일이거든 모름지기 대의를 따라 (때로는, 사즉생(死卽生)의 결단으로) 풀어나가면 될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렇건만, 아직도 우리에겐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은 모양이다.

우리에겐 아직도 보다 더 깊게 '공화'를 연구하고, 또 보다 더 멀리 '공의'와 '합리'를 공부해야하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하기는, 가파른 언덕길보다 편안한 내리막길을 택하는 게 당장 힘은 덜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른 길이라면 또 힘이 더 들어도 '약속의 길'은 가야하는 게 너무나 분명한 당위의 도가 아닐까?

한번 옳다고 믿었거든 '사즉생'의 정신으로 일관하는 게 모두를 살리는 대도가 아니던가.

산은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무쪼록 새로운 교단의 혁신과 중흥을 위해 모두들 당초의 초지(初志)를 태산처럼 지켜나가기를 바래본다. 구름에 가리어도 산은 그대로 제 준엄한 산의 모습을 잃지 않듯이 말이다.

다시 바라거니와, 우리 모두 다시 망아진아현(忘我眞我現)의 굳은 서원과 실천으로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정체와 혁신의 벽을 돌파하는 대약진의 대열에 더욱 힘차게 나섰으면 한다.

<분당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