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전라도로 이사올 것을 권유받은 송벽조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과 상의를 한다. 어릴적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손자(정산종사)의 장성하는 모습을 익히 지켜본 조부는 칠십이 넘은 고령에도 기꺼이 아들(송벽조)의 제의를 허락한다.

사는 집이고 전답을 싼 가격에 처분한 송벽조는 먼저 영광으로 갔다. 음력 9월에 이사를 올것이니, 살 집과 전답을 구해 달라고 대종사 측근에게 부탁을 하고 성주로 돌아왔다. 음력 9월이 되어 가족을 솔거하고 전라도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도보로 걷기도 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나왔다.

함께 나선 가족은 정산종사의 할아버지 송훈동(호적명 성흠), 부모 송벽조·이운외, 처 여청운, 남동생 송도성 다섯 식구였다. 이때 정산종사는 부안 월명암에 있었고, 정산의 누나는 칠곡군 약목면 전주 이씨가로 시집을 간 뒤였다. 정산종사 누나의 사위가 농림부장관을 지낸 박동묘이다.

필자가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무출신의 길에 나서서 영산선원 간사 근무 2년을 마치고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복학해서 중타원 여청운 사모님을 뵈었다. 지금의 원로원 울안에 정산종사 사모님이 살고 있었다. 청운할머니는 필자를 참으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먹을 것이 귀한 때인데, 여러 차례 내어 놓으셨다. 그 당시 21살인 필자에게 정산종사 사모님은 당신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소상히 말씀해 주셨다.

시집온 이야기며, 전라도로 이사와 영광과 익산서 살아온 이야기를 두시간 넘도록 해 주셨다. 전라도로 괴나리봇짐을 이고 지고 이사온 이야기를 하면서, 시동생인 주산종사가 멀미가 심해서 이사하는 과정 내내 가족들이 무척 고생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영광에 도착을 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가족이 살 집과 토지를 마련해 놓기로 한 사람이 신용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이 돈을 몽땅 탕진하고 말았다. 철석같이 믿었던 그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영광읍 연성리(군도리) 육산 박동국(대종사의 아우)의 집으로 가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인하여 전재산을 날린 구산 송벽조 일가는 천리 타향에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 일에 책임을 느낀 소태산 대종사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사산 오창건을 시켜 일산 이재철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군도리에서 보름 남짓 살다가 영광 남부 군서면 학정리 신촌마을로 주처를 정하게 된다. 이재철 선진이 사는 집 바로 옆집으로 얼마전 이재철이 이웃으로부터 사서 함께 사용하던 집이었다.

구산 일가는 이 집에서 5년을 살다가 갑자년에 영광 백수 길룡리로 들어와 소태산 대종사 가족과 한솥밥을 먹고 살게 된다. 대종사와 정산종사 가족은 실로 숙세의 깊은 인연들이라 생각된다. 정산종사, 주산종사 형제가 대종사의 수제자가 되었을 뿐아니라 대종사의 딸, 청타원 박길선 종사와 주산종사가 결혼을 함으로써 사돈지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종사, 일찍이 이런말을 한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주 야성(冶城) 송씨를 보면 날아가는 까마귀도 반가워 할 것이다." 얼마나 정산, 주산종사 형제가 귀하고 중하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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