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원기34년 4월1일 좌포교당에서 홍경안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흥타원 최만진(興陀圓 崔滿振) 원로교무. 고모할머니의 인연으로 원불교를 알게 된 그는 20세에 홀로 출가를 하겠다고 판단한 후 진안 좌포에서 걸어서 관촌까지 와 열차를 타고 익산으로 왔다. 당시 그는 익산 갈 차비만 챙겨들고 나왔다. 혹시라도 수중에 돈이 있으면 다시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날까봐서 였다.

그렇게 출가를 단행한 그의 첫 간사 근무지는 함라교당이었다. 간사를 하며 밤에는 교무님과 인근 청소년들에게 〈명심보감〉을 강의했다. 재미를 느낀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법회에도 참석해 많은 사람들이 교당을 찾아 교화로 연결됐다. 간사시절 함라로 남동생이 찾아왔다. 집에 가자고 사정을 했지만 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그는 목탁을 가져가서 독경과 천도법문을 읽고 인사를 했다. 그의 절도 받지 않던 아버지는 독경을 하는 것을 보고 '보통사람들과 틀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구나'해서인지 그에게 전무출신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는 "4년을 공부 시켜 주면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4년 공부시켜 줄 테니 15년만 근무하고 나오라"고 했다. 이후 동산선원에 입학해 공부를 했다.

출가 서원식을 한 후 첫 부임지는 보절교당이었다. 3대 교무였지만 교당은 남의 집 비어있는 곳에서 교화를 하고 있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땔감도 없었다. 그는 교화를 하며 논 3마지기와 쌀 50자루를 만들어 놓고 후임에게 물려줬다.

태인교당에서는 칠보 출장법회를 보았다. 칠보지역에 교당을 내기 위해 여기 저기 돌아보던 중 칠보 주민 한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주민은 장소를 제공해 줬다. 이후 매월 3회씩 출장법회를 보았다. 그 인연은 칠보에 있는 벽돌 공장 사장이었다. 지역 내 유지들도 모아 법회를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신나게 출장법회를 보던 어느날 고부 두등사 주지스님이 절 불자들 30명을 데리고 와서 법회를 보게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칠보 옆에 있는 산외에 교당이 설립되는 기연이 됐다. 그렇게 태인교당에 근무하면서 칠보 교당을 봉불 해 초대 이순석 교무와 서로 화합하며 교화를 재미있게 했다. 그리고 태인교당은 넓은 집을 사서 새롭게 만들어 놓고 이임했다.

부안교당은 4대 교무로 부임했으나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부안읍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인물이 최만욱 농협장이었다. 나는 불공을 쉬지 않았다. 농협장 책상에 전서를 놓아드리고 "선생님이 교당에 오셔서 앉아 계시기만 하면 교도가 좀 올 것 같습니다. 교화에 힘이 되어 주십시요"라고 이야기 했더니 마침내 교당에 나오게 됐다. 그 분은 교당에 올 때도 교전을 가방에 넣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오셨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원불교가 잘 보이도록 들고 다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저 사람 원불교 가네. 나도 가 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는 답을 했다. 사실 부안읍에서 영향력 있는 한 분이 교당을 나오니 많은 남자교도들이 생기게 되었다. 방 2칸이 전부였던 교당은 교도들이 다 앉을 수가 없었다. 교도들은 '우리 교당을 짓자'는 의견이 모아져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신축불사를 진행됐다.

당시 대구 봉덕교당은 이정화 교무 후임으로 부임했다. 처음으로 지어놓은 새 교당에 들어가게 됐다. 교당에 마당이 없어서 옆집 시계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래서 교당 옆에 있는 집 한 채를 사 청년회와 학생교화를 그 집에서 활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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